70 한글의 두 상태
— 물질이 될 때와 투명해질 때
70.1 멈춘 두 순간
서정주를 읽다 멈췄다. 이문열을 읽다 멈췄다. 그러나 이유는 정반대였다.
70.2 한글이 물질이 되는 순간 — 서정주
서정주를 읽으며 나는 의미에서 멈추지 않았다. 글자에서 멈췄다. 음절이 사라지지 않고, 발음이 의미보다 먼저 남고, 읽고 나면 문장이 아니라 잔여가 남는다.
「귀촉도」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 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은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 이 문장들은 무언가를 전달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메시지를 남기지 않는다. 대신 존재한다. 한글이 도구가 아니라 물질이 되는 순간이다.
70.3 한글이 투명해지는 순간 — 이문열
이문열을 읽을 때는 다른 이유로 멈췄다. 너무 잘 읽혔다.
「이 황량한 역에서」의 한 대목이다.
당신들은 누구와 사랑에 빠져든 적이 있는가? 당신들은 틀림없이 그 고귀함이나 감미로움, 헤어질 때의 고통과 슬픔이며 그 후의 공허함 따위를 미화하고 과장하려 들 테지만 기실 그 진상은 뜻밖에도 단순하고 명백하다. 그것은 당신이 이 여행 중에 눈길을 끄는 한 소녀와 만났다는 것이며, 결국은 부정확하기 마련인 관찰에 이어 당신이 던진 호의 섞인 눈길에 그녀가 답했다는 것이며, 무료를 함께 달래자는 당신의 용기를 다한 요청에 그녀가 다소곳이 응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약간은 야릇한 열에 들뜬 당신들이 깜박깜박 자기를 잊어가며 주고받은, 분명 달콤하고 섬세하나 또한 그리 대단할 건 없는 몇 개 유형의 행위와 가끔씩은 정색해도 좋을 대화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문장이 길고 복잡한데도 걸리지 않는다. 다 읽고 나면 “사랑의 허무함”이라는 의미만 남고, 어떤 단어로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언어가 마찰을 만들지 않고, 의미가 곧바로 흐르고, 문장은 기억되지 않는다. 한글이 존재를 주장하지 않고 완전히 투명해진 순간이다.
70.4 같은 글자의 두 극단
얼핏 보면 서정주가 좋고 이문열이 나쁘거나, 혹은 반대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런 우열이 아니다. 하나는 밀도를 극단까지 올린 것이고 하나는 투명도를 극단까지 올린 것이다. 같은 한글이 양쪽 끝에서 모두 작동한다는 것 자체가 이 글자의 구조적 특성이다.
서정주는 남기기로 했고, 이문열은 지우기로 했다. 이 선택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보다 먼저 온 감각의 방향이다.
70.5 맺음
뉴턴이 미적분 대신 기하학을 택한 것도 형태에 대한 결정이었고, 갈루아가 답 대신 구조를 본 것도 같은 종류의 선택이었다. 서정주와 이문열은 같은 글자 위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밀어붙였는데, 둘 다 도착한 곳이 아름다웠다.
AngraMyNew의 파괴 공리도 방향의 문제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 칼날의 방향이 안을 향한다는 것은, 지울 것을 먼저 결정한다는 뜻이다.
같은 도구로 정반대 방향에 도달할 수 있다면, 결정하는 것은 도구가 아니라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