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한글의 두 상태

— 물질이 될 때와 투명해질 때


37.1 멈춘 두 순간

서정주를 읽다 멈췄다. 이문열을 읽다 멈췄다.

그러나 이유는 정반대였다.


37.2 한글이 남아버린 순간 — 서정주

서정주를 읽으며 나는 의미에서 멈추지 않았다.

글자에서 멈췄다.

  • 음절이 사라지지 않는다
  • 발음이 의미보다 먼저 남는다
  • 읽고 나면 문장이 아니라 잔여가 남는다

한글이 이런 글자였나?

「귀촉도」에서: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 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은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이때 언어는 무언가를 전달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메시지를 남기지 않는다.

대신 존재한다.

한글은 이 순간 도구가 아니라 물질이 된다.


37.3 한글이 사라져버린 순간 — 이문열

이문열을 읽을 때 나는 다른 이유로 멈췄다.

이번에는 너무 읽혔다.

  • 문장이 걸리지 않는다
  • 표현이 눈에 띄지 않는다
  • 서사만 남고 언어는 사라진다

한글이 이렇게 쉽게 읽혔었나?

「이 황량한 역에서」에서:

당신들은 누구와 사랑에 빠져든 적이 있는가? 당신들은 틀림없이 그 고귀함이나 감미로움, 헤어질 때의 고통과 슬픔이며 그 후의 공허함 따위를 미화하고 과장하려 들 테지만 기실 그 진상은 뜻밖에도 단순하고 명백하다. 그것은 당신이 이 여행 중에 눈길을 끄는 한 소녀와 만났다는 것이며, 결국은 부정확하기 마련인 관찰에 이어 당신이 던진 호의 섞인 눈길에 그녀가 답했다는 것이며, 무료를 함께 달래자는 당신의 용기를 다한 요청에 그녀가 다소곳이 응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약간은 야릇한 열에 들뜬 당신들이 깜박깜박 자기를 잊어가며 주고받은, 분명 달콤하고 섬세하나 또한 그리 대단할 건 없는 몇 개 유형의 행위와 가끔씩은 정색해도 좋을 대화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문장이 길고 복잡한데도 걸리지 않는다.

다 읽고 나면 “사랑의 허무함”이라는 의미만 남고, 어떤 단어로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언어는 마찰을 만들지 않는다. 독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의미가 곧바로 흐르고, 문장은 기억되지 않는다.

이때 한글은 존재를 주장하지 않는다.

한글은 이 순간 완전히 투명해진다.


37.4 두 상태는 대비가 아니다

이 두 경험은 우열 관계가 아니다.

  • 하나는 과잉이고
  • 하나는 최소화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의미 이전의 선택.

  • 남길 것인가
  • 지울 것인가

이 결정은 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악상의 방향이다.


37.5 언어의 상태 변화

이 두 순간을 통해 하나의 구조가 드러난다.

한글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성질만 갖지 않는다.

  • 밀도를 극단까지 올릴 수 있고
  • 투명도를 극단까지 낮출 수 있다

이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기교의 문제도 아니다.

어디까지 밀어붙일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37.6 AngraMyNew 해석

서정주는 언어를 남기기로 선택했다.

이문열은 언어를 지우기로 선택했다.

둘 다 설명 이전의 판단에서 출발했다.

정돈 이전의 진동이 문장 단위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고정된 사례다.


37.7 결론

한글은 언제나 의미를 담는 그릇이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무게를 얻고, 어떤 순간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서정주와 이문열은 그 두 극단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줬다.

AngraMyNew는 이 두 상태를 아름다움의 사례로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