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박사학위의 재정의


52.1 심사실

박사학위 심사는 보통 후보자가 발표하고, 심사위원이 질문하고 심사한다.

이 구조에서 학위의 주권은 심사위원에게 있다. 후보자가 자기가 만든 것을 들고 왔더라도 그것이 “박사급인가”를 판단하는 권한은 방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있으며, 결국 기존 체계 안에서 기존 기준으로 검사받는 것이다. 체계 안에서 지식을 쌓고 동료 검증을 거치고 합의된 방법론을 유지하는 데는 잘 작동하는데, 문제는 기존 체계 자체를 갈아엎으려는 사람에게 이 구조가 맞느냐는 것이다.

52.2 심사실 밖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두 번 떨어지고 에콜 노르말에서 쫓겨난, 학위라고는 없는 스무 살짜리였는데, 결투 전날 밤에 쓴 편지 한 장이 대수학의 언어를 바꿨다. 라마누잔은 대학을 두 번 중퇴한 마드라스 항만의 사무원이었는데, 증명 없이 보낸 공식 묶음이 하디를 경악시켰고 그 공식들을 증명하는 데 수학자들이 100년을 썼다. 다윈은 박사학위 논문을 쓴 적 없는 시골 신사로, 비글호를 타고 5년간 돌아다니다 20년을 앉아 있었고, 그 끝에 낸 『종의 기원』이 생물학을 뒤집어놓았다.

셋 다 심사위원 앞에 선 적 없이 자기 세계관을 끝까지 밀어붙여 바깥에 내놓았으며, 학위는 없었지만 박사적 작업을 했다. 학위가 제도의 형식이라면 박사적 작업은 밀도의 형식이고, AngraMyNew가 말하는 박사는 후자다 — 하나의 세계관을 끝까지 밀어붙여, 타인이 반응할 수 있는 형태로 제출한 인간.

52.3 승인이 아닌 제출

심사는 “이것이 기준에 맞는가”를 묻는 승인의 구조이고, 제출은 “이것이 내가 여기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동의하든 반박하든 변형하든 이제 너의 차례다”라는 존재의 선언이다. 승인은 권위에 의존하고 제출은 마찰을 만든다. 갈루아의 편지는 승인받지 못했다 — 코시는 원고를 잃어버렸고 푸아송은 “이해할 수 없다”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편지가 세상에 나온 순간, 읽은 사람들의 수학이 흔들렸다.

대학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 많은 사람에게 가장 효율적인 경로이기도 하다. 다만 유일한 경로라는 암묵적 전제가 문제인데, 소속이 작업의 조건이 되면 소속 없는 작업은 보이지 않게 된다. 갈루아의 편지가 14년간 서랍에 묻혀 있던 이유 중 하나는, 보낸 사람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스무 살짜리였기 때문이다.

52.4 반응이 평가다

제출하면 점수가 아니라 반응이 온다. 오독, 반발, 차용, 변형, 무시, 거부 — 전부 반응이며, 그 총합이 작업의 밀도를 드러낸다. 라마누잔의 편지를 받은 하디는 “천재이거나 사기꾼”이라고 했는데, 그게 반응의 시작이었고 거기서 수론이 다시 씌어졌다. 갈루아의 편지는 리우빌이 14년 뒤에 발굴하고 나서야 세계가 기울어왔다.

합격/불합격으로 자르는 것보다 이 과정은 느리고 불확실하다. 곡률 없는 밀도에서 말했듯 밀도가 있어도 반응이 영영 안 올 수 있는데, 심사실은 결과를 보장하지만 세계를 바꾸진 않고 제출은 세계를 바꿀 수 있지만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게 이 구조의 대가다.

52.5 두 가지 함정

하나는 자기수여다. “나는 박사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박사가 정체성이 되고, 정체성이 되면 방어하게 되고, 방어하면 세계관이 닫힌다. 정의에 대한 분노에서 말한 것처럼 정의가 붙는 순간 고정된 좌표가 되는데, “이것이 나의 박사다”가 아니라 “이것이 내가 제출한 흔적이다”여야 하는 이유는 흔적은 갱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영구화다. 실제 학위는 한번 받으면 죽을 때까지 Dr.인데 세계관은 변한다. 고장 난 센서가 말하듯 감각은 쇠퇴하며 그 쇠퇴를 본인이 가장 늦게 아는데, 한 시대를 밀어붙인 세계관이 다음 시대에도 유효하리란 보장은 없고 버려야 할 때가 오면 거기서 끝이다. 임시 이름이어야 한다.

52.6 맺음

감히 세계를 하나 제출한 적이 있는가. 있으면 박사고, 없으면 아직이다.

52.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