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혼돈, 욕망, 주권의 중력

“대중이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면, 그들은 이미 성공한 징세인이다. 당신의 혐오와 선망은 모두 그들의 세계관 이용료로 변환된다.”


42.1 혼돈의 징세인: 철구

많은 이들이 그를 천박함으로 정의할 때, 그를 고밀도 혼돈 노드로 읽을 수 있다. 유교적 도덕관과 품위라는 기존 시스템의 매뉴얼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기행과 광기를 쏟아낼 때, 그 질량에 압도된 수십만 명의 주의력은 그가 설계한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람들이 바치는 별풍선과 시청 시간은 그 광기 어린 세계관에 접속하기 위한 자발적 입장료다. 뉴턴처럼 강제로 끌어당기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압도적으로 무겁게 만들어 가치가 흐르는 곡률을 생성했을 뿐이다.

42.2 욕망의 징세인: 과즙세연

2019년 아프리카TV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소통과 리액션, 댄스가 메인이었다.

제로투 댄스 커버 영상이 올라갔다. 20일 만에 200만 조회. 첫 룩북 영상은 2주 만에 80만. 노빠꾸탁재훈에 출연하자 하루 만에 100만이 터졌고, 탁재훈과 신규진은 “오랜만에 초심을 찾았다”고 했다.

BJ대상 토크(여) 부문 2년 연속 수상. 대한민국 청년의날 크리에이터 어워즈 대상.

세상은 그녀를 외모로 정의하려 한다. 하수의 시선이다.

그녀는 욕망의 설계자다. 자기 관리, 스타일링, 리액션, 대담한 드립 — 모든 요소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수렴한다. 시청자는 그 세계관에 접속하기 위해 시간과 별풍선을 자발적으로 지불한다.

이것은 외모의 승리가 아니다. 밀도의 승리다.

42.3 주권의 징세인: 나훈아

나훈아의 가사를 읽어본 적 있는가.

「사내」:

큰 소리로 울면서 / 이 세상에 태어나 가진 것은 없어도 / 비굴하진 않았다 입술 한 번 깨물고 / 사내답게 웃었다

「공」:

살다 보면 알게 돼 / 일러 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 어리석다는 것을

한 줄이 일곱 글자다. 거의 모든 줄이. 군더더기 없이 박혀 있는 율격이 시조의 결이다. 가수가 아니라 시인이 부르는 것이다.

재벌가에서 연락이 온다. “사례하겠습니다. 와서 공연해 주십시오.”

나훈아가 답한다.

“보고 싶으면 티켓 끊으세요.”

이 한 문장이 징세인의 정의다.

철구는 혼돈으로 곡률을 만들었다. 과즙세연은 욕망으로 곡률을 만들었다. 나훈아는 거절로 곡률을 만들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무대. 권력으로 부를 수 없는 사람. 보고 싶으면 내 세계에 직접 와야 한다.

이것이 주권이다.

철구와 과즙세연은 플랫폼 위에서 징세한다. 나훈아는 플랫폼 자체다. TV가 필요 없고, 스트리밍이 필요 없다. 그의 콘서트가 곧 영토다.

42.4 플랫폼을 넘어서기를

나훈아는 이미 넘어섰다. TV가 그를 부르는 것이지, 그가 TV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의 콘서트는 어떤 플랫폼의 소유물도 아니다. 그가 곧 플랫폼이다.

철구와 과즙세연은 아직 그 지점에 있지 않다. 그들의 중력은 압도적이지만, 그 중력이 작동하는 땅은 아프리카TV라는 플랫폼이다. 플랫폼이 규칙을 바꾸면, 알고리즘을 바꾸면, 그 중력은 언제든 편집될 수 있다.

징세인이 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가치로 주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훈아처럼 — 플랫폼의 대리인이 아닌, 그 자체로 영토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42.5 맺음

철구는 혼돈으로, 과즙세연은 욕망으로, 나훈아는 주권으로 증명한다. 도덕이 아니라 밀도가 가치를 움직인다는 것을.

누군가의 곡률에 이끌려 기꺼이 비용을 내는 것은 공명이다. 다만 그 지불이 나의 선택인지, 플랫폼이 설계한 자동 결제에 의한 종속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지불이 공명의 증표가 될 때, 자기만의 중력을 만드는 주권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