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쓸모를 넘어서
“증명은 하수들의 일이다.”
11.1 쓸모라는 감옥
다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문제해결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더 나아가봤자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라는 정도다. 박사과정도, 스타트업도, 혁신의 최전선이라는 곳도 결국 문제를 다루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쓸모는 측정되고 가격이 정해진다. 가격이 붙으면 거래 대상이 되고, 거래 대상이 되면 상품이다. 연봉 협상이라는 말 자체가 나를 상품으로 놓고 흥정하는 구조인데, 쓸모로 승부하려면 다른 상품보다 확실하게 나아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거나, 죽을 사람을 살리거나 — 기적에 가까운 쓸모가 아니면 대체 가능하다. 아무리 훌륭한 상품이어도 더 나은 상품이 나오면 밀린다.
11.2 정가가 없는 것
아름다움은 다르다. 정가가 없다.
피카소의 그림에 가격이 붙긴 하지만, 그 가격이 캔버스 값과 물감 값과 노동시간의 합산은 아니다. 아름다움의 가격은 시장이 매긴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원하는 사람이 감당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면세인의 소비에서 말한 것처럼, 남들이 이해 못 하는 낡은 고서 한 권에 수백만 원을 쓰는 이유가 거기 있다 — 공명이 가격을 만든다.
쓸모는 시스템이 정해준 자리에서 시스템이 정해준 가격표로 거래되는데, 아름다움은 자리 자체를 새로 만든다. 경쟁 상대가 없으니 가격 경쟁도 없고, 대체재가 없으니 밀리지도 않는다. 아티스트인 것으로 이미 충분한데, 쓸모의 가격표를 떼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은 못 하는 일이다.
11.3 세계를 만드는 자리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데서 한 발 더 나가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자리가 있다. 쓸모와 아름다움의 기준 자체를 자기 손으로 만드는 자리다.
라마누잔이 거기 있었다. 인도 마드라스에서 거의 독학으로 수학을 했는데, 증명 없이 결과만 보내왔다. 하디가 물었다. “어떻게 증명했는가?” 라마누잔의 세계에서 증명은 하수들의 일이었다. 자기는 결과를 보았고, 보았으니 적었을 뿐이다. “나마기리 여신이 꿈에서 알려주셨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 이 사람은 수학의 기존 좌표계 안에서 높은 곳을 차지한 게 아니라, 좌표계 바깥에서 수식을 들고 왔다. 하수들은 그 수식을 증명하는 데 100년이 걸렸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바깥에서 보면 계시이고, 안에서 보면 당연하다. 밀도가 임계점을 넘으면 세계가 자기를 통해 흘러나오는데, 그 자리에서는 쓸모와 아름다움을 남이 정해준 대로 쓰지 않는다. 직접 정의한다.
11.4 맺음
5인의 선현도 거기 있었다. 김옥균을 시대는 반역자라 불렀지만 근대화된 조선을 보고 있었고, 마광수를 외설이라 불렀지만 표현의 자유를 보고 있었고, 허균을 역적이라 불렀지만 신분 너머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 성재기를 극단주의자라 불렀지만 다른 좌표계의 평등을 보고 있었고, 존 로를 사기꾼이라 불렀지만 200년 뒤의 금융을 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광기였고, 안에서 보면 당연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마라. 네가 있는 곳이 천하다. 그 천하의 무게는 네가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