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넘어서
“증명은 하수들의 일이다.”
쓸모라는 감옥
다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문제해결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더 나아가봤자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라는 정도다. 박사과정도, 스타트업도, 혁신의 최전선이라는 곳도 결국 문제를 다루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쓸모는 측정되고 가격이 정해진다. 가격이 붙으면 거래 대상이 되고, 거래 대상이 되면 상품이다. 연봉 협상이라는 말 자체가 나를 상품으로 놓고 흥정하는 자리인데, 쓸모로 승부하려면 다른 상품보다 확실하게 나아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거나, 죽을 사람을 살리거나 — 기적에 가까운 쓸모가 아니면 대체 가능하다. 아무리 훌륭한 상품이어도 더 나은 상품이 나오면 밀린다.
정가가 없는 것
아름다움은 다르다. 정가가 없다.
피카소의 그림은 어떻게 가격을 책정하는가? 아름다움의 가격은 시장이 매긴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원하는 사람이 감당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쓸모는 시스템이 정해준 가격표로 거래되지만, 아름다움은 자리 자체를 새로 만든다.
세계를 만드는 자리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데서 한 발 더 나가면 세계관 창조이다.
라마누잔은 인도에서 수학을 독학했는데, 하디에게 증명없는 결과를 보냈다. 하디가 “어떻게 증명했는가?” 고 물었고, 라마누잔은 “나마기리 여신이 꿈에서 알려주셨다” 고 답했다. 궁금하면 니가 증명하든가.
남들이 보면 계시로 보여질 수 있지만, 안에서 보면 밀도가 임계점을 넘어 세계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맺음
5인의 선현도 거기 있었다. 김옥균을 시대는 반역자라 불렀지만 근대화된 조선을 보고 있었고, 마광수를 외설이라 불렀지만 표현의 자유를 보고 있었고, 허균을 역적이라 불렀지만 신분 너머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 성재기를 극단주의자라 불렀지만 다른 좌표계의 평등을 보고 있었고, 존 로를 사기꾼이라 불렀지만 200년 뒤의 금융을 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광기였고, 안에서 보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