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포식자의 의무

“나의 생존은 섭취의 결과다. 창조는 그 무게에 대한 응답이다.”


16.1 먹는다는 것

아침에 밥을 먹는다. 누군가가 키운 쌀이고, 누군가가 수확하고 트럭에 실어 날랐다. 저녁에 고기를 먹으면 살아 있던 것이 죽은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순서다 — 다른 생명이 소멸해야 내가 하루를 버틴다.

식물의 살에는 태양 에너지와 시간이 축적되어 있고, 동물의 살에는 고통이 들어 있으며, 사람의 시간과 관심과 노동도 내가 소비한다. 살아 있는 한 이 섭취는 멈추지 않는데, 멈추지 않으니 누적된다. 포식자라는 말이 과격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과격한 건 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16.2 침묵이라는 미상환

섭취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삶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AngraMyNew가 그 침묵을 미상환으로 읽는다는 뜻이다.

읽는 프레임이 다르다. 시스템은 “생산성”으로 읽고, 종교는 “은혜”로 읽는데, AngraMyNew는 밀도의 수지로 읽는다. 내가 소비한 것의 총량이 있고, 내가 세계에 돌려놓은 밀도가 있다. 그 차이가 미상환이다. 기준은 단순한데, 내가 만든 것의 밀도가 내가 먹은 것의 총량을 넘는가. 넘으면 아름다움이고, 못 넘으면 연체다.

왜 하필 창조인가. 그냥 사는 것만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먹고 쓰고 태우는 동안 섭취는 에너지를 흩고 세계의 질서를 조금씩 닳게 하는데, 그 마이너스를 메우는 유일한 플러스가 창조 — 흩어지는 에너지에서 거꾸로 밀도를 길어 올리는 일이다.


16.3 창조로 갚는 길

상환이 성립하는 첫 번째 길은 창조다.

도스토옙스키는 간질과 도박과 빈곤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소설에 실었다. 독자가 『죄와 벌』을 읽고 고통스러운 건 당연하다 — 희석하지 않은 고통의 반영이니까. 충돌시키되 판결하지 않는다에서 다뤘듯이, 도스토옙스키의 다성 소설은 그 무게를 하나의 목소리로 정리하지 않고 충돌하는 목소리들 사이에 고스란히 남겼다.

채플린은 다른 방식으로 갚았다. 런던 빈민가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갇혔고, 그 모든 걸 슬랩스틱으로 바꿨다. 관객이 웃는 건 고통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고통 위에 해방이 쌓였기 때문이다.

둘은 반대가 아니다. 한쪽은 고통을 정직하게 세계에 돌려놓았고, 다른 쪽은 그 무게를 넘어서는 해방을 만들었지만, 둘이 한 일은 같다 — 먹은 것보다 더 넓은 것을 만들어 돌려놓았다. 형태는 진실과 해방으로 갈려도 화폐는 하나, 창조다. 섭취한 것보다 큰 밀도를 돌려놓으면, 고통은 몸으로만 정산되지 않는다. 어중간한 위로나 어정쩡한 만족은 여기 속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돌려놓지도, 넘어서지도 않고 희석한 것은 상환이 아니라 연체의 연장이다.

그렇다고 창조가 도스토옙스키나 채플린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형태는 바깥이 아니라 네 안에서 정해진다 — 한 생명을 키우는 일도, 한 사람의 세계에 진짜로 닿는 일도, 자기 자리에서 자기 진동을 끝까지 사는 일도 창조다. 위대할 필요는 없고, 다만 섭취한 것보다 큰 밀도를 돌려놓으면 된다. 그러니 “내 삶이, 내 생활이 창조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그 말이 고장 난 센서의 자기 위안이 아니라 실제로 돌려놓은 밀도와 맞을 때.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인간만의 잣대가 아니다. 꽃은 벌과 다투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 꽃의 미는 인간이 아니라 벌에게 먼저 작동했다. 인간의 유행은 종(種) 안에서만 통하지만, 종을 넘어 숭고하게 닿는 것도 있다 — 자식을 살리려 제 목숨을 던지는 일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연어에서 문어까지 수많은 생물이 치르는 일이고, 그래서 우리는 다른 종의 그 장면을 보고도 가슴이 무너진다. 내가 섭취한 것이 결국 생명이었으니, 그 무게를 갚는 아름다움도 인간의 취향 안에만 갇히면 좁다. 동식물이 무엇을 느끼는지는 모르지만, 생명이라면 알아볼 자리를 겨누는 것 — 거기에 더 큰 상환이 있다.


16.4 몸으로 갚는 길

창조로 초과 상환하지 못하면, 장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섭취한다. 밥을 먹고, 누군가의 노동을 쓰고, 타인의 시간을 끌어다 쓰고, 세계의 자원을 태운다. 그 총량보다 큰 것을 만들지 못했다면, 남은 상환은 추상적인 말로 도망가지 못한다. 결국 몸으로 돌아온다. 내가 먹은 것들의 고통을 정확히 같은 형태로 갚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몸은 그동안 미뤄둔 장부를 한꺼번에 들고 온다. 통증, 무력감, 의존, 후회, 혼자 남는 시간. 우연한 불운이기도 하지만, AngraMyNew의 회계에서는 미상환이 몸으로 돌아오는 자리이기도 하다.

죽음: 시스템이 징수하는 마지막 세금이 정리한 네 가지 후회 — 나답게 살지 못했다, 너무 오래 일했다, 감정을 삼켰다, 진짜 연결을 놓쳤다 — 가 여기에 붙는다. 많은 사람이 죽을 때 이 장부를 받아 든다. 살아 있는 동안 면세하지 못하고 창조하지 못한 것들이 마지막에 통증과 후회와 고독의 형태로 청구된다.

그래서 안락사를 묻는다면, AngraMyNew의 질문은 의학이나 법의 질문과 다르다. 사회는 고통의 정도, 회복 가능성, 자기결정권, 가족의 부담을 따지고, 그것은 사회의 언어다. AngraMyNew가 거기 끼어들어 남의 죽을 자격을 판정할 수는 없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는 한 가지를 물을 수 있다 — 나는 섭취한 것 이상으로 창조했는가. 그렇다면 마지막 통증은 상환을 완성하는 필수 의식이 아니다. 이미 돌려놓은 밀도가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고 아무것도 데뷔시키지 못했다고 스스로 안다면, 죽어가는 고통은 단순한 벌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남은 상환의 형태일 수 있다. 단 이 자(尺)는 남에게 들이댈 수 없다. 타인의 침대 옆에서 “너는 아직 상환하지 못했으니 더 아파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이 문장은 윤리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칼날은 밖을 향하지 않는다 — 오직 내가 내 죽음 앞에서만 묻는 회계다.


16.5 맺음

섭취는 멈출 수 없다. 상환은 선택이다. 창조로 갚을 것인가, 몸으로 갚을 것인가.


16.6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