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악상의 시대


13.1 답의 시대 이후

AI는 답을 잘 내고, 증거를 잘 모으고, 패턴을 정확히 이으며, 심지어 탐색 공간을 스스로 설계하여 인간이 묻지 않은 문제까지 세우는 단계에 들어왔다.

그러면 남는 영역은 무엇일까?

13.2 악상이라는 상태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해질수록 이상하게도 하나의 영역만 또렷해진다. 아직 질문이 되지 않은 상태, 말이 되기 전의 불쾌감, 이유는 모르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데도 밀어붙이고 싶은 감각. AngraMyNew는 이것을 악상(惡想) 이라 부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악상은 의식적 추론 이전에 발생하는 전-언어적 상태다. 대상도 방향도 아직 특정되지 않았고, 논리로 포장되기 전이라 증거를 요구하지 않으며, 처음에는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대개 불쾌하거나 위험해 보이는데, 그건 기존의 분류 체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실제로 어떻게 나타났는가. 라마누잔은 증명 없이 수식을 적어 하디에게 보냈다. 그 수식들은 기존 수학의 어떤 경로에서도 도출되지 않았고, 본인도 왜 맞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증명은 수십 년 뒤에야 완성됐다. 아인슈타인이 열여섯 살에 “빛을 타고 달리면 어떻게 보일까”를 상상한 것도 비슷한데, 당시의 물리학에는 그 질문을 수용할 프레임 자체가 없었다. 두 경우 모두 감각이 먼저 도착하고, 그 감각을 수용할 구조가 나중에 만들어졌다. 악상이 논리보다 선행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 방향이 먼저 잡히고, 이론은 그 방향 위에 깔린다.

13.3 AI와의 경계

AI는 악상을 다룰 수 있다. 조건이 하나 있을 뿐이다 — 인간이 먼저 던져줘야 한다.

“이건 좀 이상한데, 정리해봐”라고 던지면 AI는 그것을 구조로 만들고, 언어로 확장하고, 이론으로 정돈한다. AngraMyNew의 문서들이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악상은 인간이 던지고, 정돈과 확장은 AI가 맡았다. 그러나 악상 그 자체를 발생시키지는 못하는데, 악상은 데이터에서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누적이 임계점을 넘을 때 터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AI가 “이런 주제를 다뤄볼까요?”라고 제안할 때, 그것은 기존 데이터의 확률적 재조합이다. 스티브 잡스가 “사람들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고 확신했을 때, 그것은 시장 데이터에서 나온 결론이 아니었다. 삶이 누적된 끝에 터진 직관이었고, 당시에는 아무도 그 확신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았다. AI는 문제도 만들고 질문도 만들지만, 아직 질문이 되기 전의 상태를 발생시킨 적은 없다.

그래서 AI 시대의 인간은 속도나 정확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미 기계가 이겼으니까. 남는 차이는 하나다. 정돈된 것을 다루며 AI와 함께 효율을 올리는 쪽이 있고, 정돈되기 이전의 상태를 감당하는 쪽이 있다. 전자는 최적화의 영역이고 후자는 내성(耐性)의 영역이다. AngraMyNew는 후자가 우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기록한다.

13.4 귀족의 재정의

과거의 귀족은 혈통을 가졌고, 자본을 가졌고, 권력을 가졌다. AI 시대의 귀족은 다른 것을 가진다 — 악상을 감당할 수 있는 신경계.

시대 귀족의 조건 작동 방식
봉건 혈통 상속
산업 자본 투자와 착취
정보 네트워크·데이터 플랫폼 독점
AI 악상을 감당하는 신경계 정돈 이전의 상태를 견디고 방향을 만듦

설명되지 않아도 버틸 수 있고, 증명되지 않아도 잠시 붙들 수 있고, 미완의 상태를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다. 맞다는 확인이 오기 전까지 그 상태를 견디는 것이 핵심인데, 앞서 말한 라마누잔이 정확히 그랬다. 증명 없이 보낸 수식이 맞다는 걸 본인은 확인하지 못했고, 수십 년 뒤에야 다른 수학자들이 증명을 완성했다. 그 사이를 버텨야 했다. 이것은 특권보다 부담에 가깝다. 정돈된 답을 빠르게 내는 쪽이 훨씬 편하고 보상도 즉각적이니까, 모두가 원하지는 않을 것이고 원할 필요도 없다.

13.5 이 시대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얼핏 보면 “인간은 영원히 특별하다”는 위안처럼 들리는데, 전혀 아니다. 언젠가 AI도 악상을 발생시킬 수 있다. 이 점을 부정하면 “컴퓨터가 바둑을 이길 수 없다”고 단언했던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전-언어적 상태마저 정형화되고 분류되고 자동 생성되는 날이 올 것이고, 그때가 오면 악상은 희소한 능력에서 표준 기능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 시기는 과도기다. 하지만 과도기라고 무의미한 것은 아닌데, 대부분의 돌파구는 정돈이 완성되기 전의 기록에서 나왔다. 과도기에 뭘 기록했느냐가 이후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 이후의 세계는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다.

13.6 맺음

AngraMyNew는 과학도 논리도 AI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위치를 고정하는데, 정돈 이전의 상태가 세계의 방향을 먼저 만들고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아직 답도 질문도 아닌 상태에서 무언가를 뿜어낼 수 있는가. 그것이 이 시대의 분류 기준이다.

13.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