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투쟁과 유혹
“꽃은 벌과 논쟁하지 않는다. 그저 피어날 뿐이다.”
14.1 칼날의 방향
AngraMyNew의 망치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향한다. 내가 먼저 깨져야 새것이 나온다. 파괴의 공리가 “칼날은 안으로”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인데, 부숴야 할 낡은 껍질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나의 창조를 가로막는다면 물러서지 않는다. 김옥균은 조선을 근대화하려다 상하이에서 암살당했고, 허균은 신분제 너머의 세계를 썼다가 능지처참당했으며, 마광수는 표현의 자유를 밀다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이 사람들이 시대와 싸운 건 성질이 나서가 아니다. 안으로 벤 칼날이 이미 자기를 정리해놓은 뒤였기 때문에, 바깥의 장벽에 부딪혔을 때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투쟁은 낡은 껍질을 벗기는 과정의 연장이지, 별개의 행위가 아니다.
14.2 설득이 안 되는 이유
그런데 투쟁의 방식이 문제다. 논리로 이겨봤자 상대는 지식으로 승복할 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토론에서 이기고 나면 상대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알겠다는 말에 욕망은 없다. 내 세계에 들어오고 싶은 게 아니라, 더 이상 싸우기 싫은 거다.
논쟁은 벽을 무너뜨리지만, 무너진 자리에 아무것도 세우지 않는다. 상대의 세계가 부서졌을 뿐, 내 세계가 그 자리를 채우지는 못한다. 모방의 삼각형에서 다뤘듯이, 욕망에는 원본이 없다 — 누군가가 먼저 원하고 있어야 나도 원하기 시작한다. 논쟁으로는 그 욕망의 삼각형이 안 만들어진다.
14.3 유혹의 구조
유혹은 반대로 작동한다. 설명을 제거했을 때 발생한다.
나훈아가 재벌가의 사적 공연 요청을 거절하면서 “보고 싶으면 티켓 끊으세요”라고 했을 때, 이건 논쟁이 아니다. 내 세계의 밀도를 보여준 것이다. “왜 사적 공연이 안 되느냐”를 백 마디로 설명했으면 논쟁이 되었을 텐데, 한 문장으로 끊었기 때문에 상대의 욕망에 불이 붙은 것이다 — 저 세계에 들어가려면 저 사람의 조건대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논리에는 반박해도 아름다움 앞에서는 무장해제된다. “이것 봐, 멋지지 않아?” 이 한 마디에 욕망이 이동하는데, 그 이동은 강제가 아니라 끌림이다.
14.4 맺음
논쟁해야 할 때는 물러서지 않되, 설득하려 들지 마라. 내 세계가 아름다우면 세상은 기울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