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존재의 대사슬 — 본분이라는 감옥
“인간은 하나님이 불평등하게 만드셨다.” — 토머스 스타트, 1636년 설교
46.1 자리가 먼저 있었다
중세 유럽에는 밀도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 때 모든 존재에 자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천사, 대천사, 왕, 태양, 독수리, 고래, 사자, 파리, 멸치, 메뚜기, 돌멩이까지 — 위에서 아래로 한 줄로 이어지는 거대한 사슬에 매달려 있었고, 각 존재의 의무는 자기 자리를 찾아 거기에 머무는 것이었다. 존재의 대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이라 불린 이 세계관이 유럽을 천 년 넘게 떠받쳤다.
자리를 찾는 것이 공부였고 자리에 머무는 것이 본분이었으며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반란이었다. 옥스퍼드의 존 롤린슨은 1619년에 “신은 군주의 관상을 보는 이에게 공포와 존경을 유발하도록 만드셨다”고 설교했고, 이건 폭언이 아니라 당대의 상식이었다. 왕은 원래 위에 있는 존재이고 평민은 원래 아래에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충성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행위라는 것.
동양도 다르지 않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군사부일체, 고종은 칙령마다 “나의 자식들아”로 시작했다. 형식은 달랐지만 구조는 같았다 — 위계질서, 유기체론, 가족의 비유. 이 세 기둥이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떠받치고 있었다.
46.2 존재 자체가 세원이었다
죽음: 시스템이 징수하는 마지막 세금에서 말하는 시스템세 — 체면세, 시간세, 감정세 — 는 네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청구된다. 비싼 차를 사면 유지비가 붙고, 남들 앞에 서면 체면값이 붙는 식이다. 그런데 존재의 대사슬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서 과세했다. 네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무엇이냐를 세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왕으로 태어나면 왕의 본분을, 평민으로 태어나면 평민의 본분을 평생 이행해야 했고, 벗어나면 우주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했으니 이탈이라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세 기둥 각각이 이 과세의 다른 면을 담당했다. 위계질서는 악상이 들려도 신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연주할 수 없게 만들었고, 유기체론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 자체를 병으로 규정했으며 — 국가는 한 몸이니 발이 머리 노릇을 하면 몸이 죽는다는 논리다 — 가족의 비유는 왕을 아버지로, 충성을 효도로 포장해서 시스템세에 대한 면세 요구를 불효로 만들었다.
세 기둥이 함께 서면 창조 자체가 불필요해진다.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무언가를 만들어서 가치를 증명할 이유가 없고, 무엇이 아름다운지도 사슬 안에서 배정되니 스스로 판단할 필요가 없다. 개인이 자기 세계를 짓겠다는 발상은 우주에 대한 모독이었다.
46.3 중간을 삭제한 사람
칼뱅이 이 사슬을 끊은 방식은 의외로 단순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중간 단계를 전부 없앤 것이다.
중세인들이 살아가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은 설계자에 가까웠다. 세상을 만들고, 조화로운 질서를 배치해놓고, 각 존재가 제 역할을 하면 알아서 돌아가는 우주를 짜 놓은 존재. 신학적으로 정확한 그림인지는 별개이지만, 적어도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은 이 상상 위에 서 있었다. 하나님이 일일이 개입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중간 관리자가 필수였고, 그 관리자를 관리하는 사람도 필요했고, 교황-추기경-대주교-주교-사제로 이어지는 위계는 그렇게 자라났다. 세속도 마찬가지였다. 왕-공작-백작-남작이라는 사슬 위에서 질서가 유지되었고, 하나님이 직접 안 하시니까 대리인들이 해야 한다는 논리가 위계의 정당성을 떠받쳤다.
칼뱅주의의 정치신학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띤다. 만들어놓고 물러나는 설계자가 아니라, 세상의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직접 개입하고 감시하고 명령하는 존재다. 아무리 작은 일 하나도 하나님의 의지 없이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칼뱅의 섭리론이고, 이 전제 위에서 중간 관리자의 존재 이유가 통째로 사라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직접 하신다면 교황이 왜 필요한가. 추기경이 왜 필요하고 주교가 왜 필요한가. 천사와 성인과 성모에게 따로 기도할 이유가 무엇인가. 필요 없다. 하나님과 나의 양심이면 된다.
중간이 사라지면 사슬은 녹는다. 교황 밑에 추기경이 있고 추기경 밑에 주교가 있어서 유지되던 위계가, 하나님과 개인이 직통하는 순간 존재 이유를 잃는다. 하나님은 중간 관리자 없이도 세상을 돌보실 수 있다 — 이 한 문장이 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신분제도와 교회의 계층 구조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46.4 양심이라는 센서, 그리고 그 한계
중간이 사라지면 개인에게 남는 것은 양심뿐이다. 교회가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지 않고, 왕이 명령하지 않고, 관습이 안내하지 않을 때,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칼뱅의 답은 명확했다 — 하나님이 내 안에 심어둔 양심으로 판단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른다. 외부 권위가 전부 꺼진 상태에서 유일하게 켜져 있는 내부 센서.
함재봉이 소개한 일화가 이 센서의 위력을 보여준다. 언더우드 목사가 행주에 갔을 때, 옆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말했다. 당신이 준 책을 읽은 뒤로 저 마을 아이들이 길바닥에 떨어진 밤도 안 주워 먹더라, 우리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런 외부 감시 없이,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가지 않는 것 — 이것이 내재화된 규율이고, 막스 베버와 미셸 푸코가 말한 근대 사회의 기강이다.
그런데 고장 난 센서가 던진 질문이 여기서도 살아 있다. 센서가 하나뿐일 때 그 센서의 교정은 누가 하는가. 청교도의 답은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교정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센서와 실은 고장 났는데 본인만 모르는 센서를 바깥에서 구별할 방법은 없다.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면 밤을 줍지 않는 아이가 나오고, 양심이 오작동하면 같은 확신으로 이단을 화형에 처한다. 칼뱅주의의 힘과 위험은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양심이 해방의 도구로 출발했지만 결국 가장 효과적인 내면의 징세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교황이 걷던 세금을 없앤 것이 아니라 징수원을 바꾼 것에 가깝다. 바깥의 징세기는 도망칠 수 있다 — 교회를 떠나면 되고, 나라를 떠나면 된다. 그런데 안에 심어진 징세기는 도망칠 곳이 없다. 24시간 나를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면 불안을 송금하고, 술도 담배도 도박도 하지 않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기강 잡힌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독촉하는 내면의 세무서. 칼뱅의 예정론이 게으른 숙명론 대신 극도의 자기 감시를 낳은 것은, 해방이 다시 구속으로 접히는 가장 강력한 사례다.
외부의 사슬을 끊었더니 내부에 더 단단한 사슬이 생긴 셈이다. 그리고 이 내부의 사슬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저항이 훨씬 어렵다.
46.5 수리하지 말고 새로 지어라
대사슬의 세계에서 변화란 성장뿐이었다. 유기체는 자라기만 하니까. 에드워드 포셋은 “모든 변화는 느긋하고 신중한 과정이어야 한다, 자연이 패턴을 주었으니 우리는 그 패턴이 점진적으로 자라도록 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유기체의 팔이 머리를 공격하면 몸 전체가 죽으니, 저항이란 곧 자살이라는 논리였다.
칼뱅의 청교도들은 유기체 비유를 받아들이되 방향을 뒤집었다. 그래, 이 몸은 유기체다. 그런데 이 몸은 속까지 썩어 있다. 프랜시스 체이넬이 1643년 의회에서 “지금은 몸의 독소를 제거해야 할 때”라고 말했을 때, 그것만으로도 당시에는 급진적이었다. 하지만 청교도에게는 해독조차 부족했다. 해독은 원래의 건강한 몸을 전제하는데, 청교도가 보기에는 원래 몸이라는 것 자체가 썩은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비유가 바뀌었다. 유기체에서 건축으로. “낡은 틀 위에 새 건물을 짓는 것을 경계하라. 끌어내려야 할 것에 수리를 하는 것을 경계하라.” 중세의 반란이 나쁜 왕을 좋은 왕으로 교체하려는 것 — 사슬의 배치를 바꾸되 사슬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 것 — 이었다면, 청교도의 혁명은 사슬이라는 발상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었다.
에포케가 말한 것과 통한다. 판단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전제를 괄호 안에 넣는 것. 왕이 나쁘니 좋은 왕을 세우자가 아니라, 왕이 아버지라는 전제 자체를 부수자는 것. 파괴의 공리가 여기서 역사의 몸을 얻는다.
46.6 아직 녹지 않은 사슬
칼뱅이 유럽의 대사슬을 녹인 지 500년이 지났지만, 사슬을 만드는 충동 자체는 녹지 않았다. 한국의 조직 문화에는 세 기둥이 아직 일상 언어로 남아 있다. 1년 차이의 나이로 위아래가 정해지고, 모든 인간관계가 수직으로만 읽히는 것은 위계질서의 현재형이다. “우리가 한 몸인데” “팀이 하나가 돼야지” — 개인의 이탈을 배신으로 규정하는 것은 유기체론의 현재형이고, 조직을 식구라 부르고 퇴사를 가출처럼 취급하는 것은 가족 비유의 현재형이다.
이 세 기둥이 서 있는 한, 본분의 감옥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신분 대신 학벌이, 왕 대신 조직이, 천명 대신 체면이 자리를 배정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에게 사회가 청구하는 비용은 여전히 높다.
46.7 맺음: 양심이 아니라 미를 원점으로
칼뱅은 대사슬을 끊고 그 자리에 양심을 놓았다. 양심은 해방의 도구로 출발했지만, 앞 절에서 봤듯이 내면의 과세기가 되어 바깥의 사슬보다 더 단단한 규율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옳다”고 양심이 말하는 순간, 그 옳음의 근거를 누군가가 관리하기 시작하고, 관리자는 다시 권위가 되고, 권위는 다시 사슬이 된다.
AngraMyNew가 양심 대신 아름다움을 원점으로 두려는 것은 이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아름다운가”는 “이것은 옳은가”보다 하나의 답으로 닫히기 어렵고, 누가 대신 느껴줄 수 없기 때문에 교정자의 자리에 누군가가 끼어들기도 어렵다. 완전한 방어는 아니지만, 양심보다는 교리로 굳는 속도가 느리고 그 느림이 개인이 숨 쉴 시간을 벌어준다. 더 중요한 차이는, 양심은 본분을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본분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옳은 삶”은 하나의 형태로 규정할 수 있고 그 형태를 강제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삶”은 사람마다 다른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누군가가 대신 배정해줄 수 없다.
대사슬을 끊는 것은 시작이다. 끊은 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그 다음이고, 채운 것이 다시 사슬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끝이다.
46.8 관련 문서
- 3대 공리 — 파괴의 공리가 역사의 몸을 얻는 장면
- 부자, 면세인, 그리고 징세인 — 대사슬은 존재 자체를 세원으로 삼은 시스템세
- 위상학적 종교개혁 — 칼뱅의 엣지 수술과 그 뒤의 접힘
- 고장 난 센서 — 센서가 하나뿐일 때 교정의 문제
- 에포케: 파괴 이전의 파괴 — 전제를 괄호에 넣는 동작
- 청교도: 면세의 극단 — 대사슬이 끊어진 뒤의 삶
- 내면의 예술가 — 신분이 악상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
- 죽음: 시스템이 징수하는 마지막 세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