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값싼 내전
— 예송논쟁은 왜 조선을 망치지 않았는가
69.1 교리싸움이 아니었다
1659년, 효종이 죽었다. 문제는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느냐였다. 서인은 1년, 남인은 3년을 주장했다. 15년 뒤 효종의 비가 죽자 같은 싸움이 반복됐다. 이것이 예송논쟁이다.
후대의 비판은 거의 한 가지로 수렴한다. 상복 기간 따위로 조정이 갈라지다니, 이런 허무한 당파싸움이 국력을 갉아먹어 나라가 망한 것 아닌가.
하지만 상복은 소재였고, 주제는 정통성이었다. 효종이 왕위를 이은 방식이 적장자 계승인가 아닌가 — 이것이 조선이라는 체제의 정당성 프로토콜에 관한 질문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의 운영체제였고, 예법은 그 운영체제의 커널이었다. 커널을 건드리면 권력의 정당성 전체가 흔들린다. 서인과 남인은 상복이 아니라 왕권의 근거를 놓고 싸웠다.
이 구조는 조선에만 있지 않았다.
69.2 피로 쓴 교리
유럽의 종교전쟁을 놓고 보면 예송이 어떤 종류의 싸움이었는지가 선명해진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리 분쟁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 번졌고,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은 수십 년간 내전을 끌었다. 물론 유럽의 종교전쟁을 순수한 교리 분쟁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정통성 프로토콜의 해석이 왕위와 영토에 직결됐다는 점에서 예송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었다. 다만 유럽은 그 싸움을 전장에서 치렀다.
고구려의 권력투쟁도 대체로 무력을 동반했다. 평양 천도 이후 구세력과 신세력의 항쟁이 이어졌고,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그 이후 아들들의 분열이 당나라 침공과 겹치며 나라를 무너뜨렸다.
예송은 아가리 파이팅이었다. 몇 명이 유배되고 몇 명이 사형당했지만, 내전은 없었고 군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민생에 직접적 타격도 거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문서가 넘쳐나지만, 그 문서의 양이 곧 물적 손실의 크기는 아니다.
69.3 안정의 대가
예송이 값싼 내전이었다는 것은 조선이라는 체제가 그만큼 안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권력투쟁을 무력이 아니라 예법 해석으로 치환할 수 있을 만큼, 정통성 프로토콜이 모든 참여자에게 공유되어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저비용 안정은 적응 압력을 약화시킨다. 고비용 경쟁 체제와 저비용 안정 체제는 다른 선택압을 만든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은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생존 압력이 사상과 기술을 밀어냈고, 유럽은 수백 년의 분쟁 속에서 군사와 제도가 경쟁적으로 변형됐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처참했지만, 그 군사적 밀도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압도했다. 전쟁이 좋아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바뀌어야 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500년간 비교적 적은 전쟁을 치렀고, 내전은 더 적었다. 민생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미덕이었다. 존재의 대사슬이 말한 위계가 작동하고, 체제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징수하고, 노드들이 자기 위치를 수용하는 안정된 시스템.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춘추전국보다 낫고, 종교전쟁의 유럽보다 낫다.
그러나 안정된 시스템은 외부 충격에 대한 면역이 약하다. 왜 이상한 체계들은 사라지지 않는가가 말한 것처럼, 체계가 잘 작동할수록 그 체계 바깥의 질문은 도착하지 않는다. 예송논쟁이 가능했다는 것은 체제 안의 언어가 충분히 정교했다는 뜻이지만, 체제 밖의 언어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69.4 충돌
조선의 비극을 예송 하나에 귀속시킬 수 없듯, 개혁 부재 하나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문명의 충돌이 조선의 저압 안정 체제가 가진 한계를 드러냈다.
19세기 서구 열강은 산업혁명과 수백 년의 군사 경쟁을 거친 고에너지 문명이었다. 아프리카의 거대 왕조들도 무너졌고, 동남아도 무너졌고, 중국도 무너졌고, 중동도 무너졌다. 무역을 하든 안 하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든 말든, 비서구 세계가 열강의 팽창을 온전히 막아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조선만의 실패가 아니었다.
예송논쟁에 망국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좌표계를 잘못 잡는 일이다. 단일 사건에 전체 역사의 실패를 덮어씌우면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비극은 예송의 과열이 아니라, 저비용 안정 체제가 오래 작동한 만큼 외부 충격에 대한 적응 여력이 좁았다는 데 있다. 내부 구조의 문제와 외부 충돌의 규모가 겹쳤다.
69.5 한계
첫째, 이 글은 예송을 값싸다고 불렀지만, 숙청당한 사람들에게는 값싸지 않았다. 체제 수준의 비용이 낮았다는 말이 개인 수준의 비극을 지우지는 않는다.
둘째, 안정이 적응 압력을 약화시킨다는 명제는 역사적 패턴이지 법칙이 아니다. 안정된 체제가 내부에서 혁신을 만들어낸 사례도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이 그 시도 중 하나였고, 대원군의 개혁도 있었다. 다만 그 시도들이 체제 전체를 바꿀 만큼의 규모에 도달하지 못했다.
셋째, 유럽이 경쟁 속에서 발전했다는 서사 자체도 하나의 독해일 뿐이다. 유럽인들 스스로도 그 경쟁을 긍정하지 않았다 — EU는 그 전쟁의 반복을 멈추기 위한 시도이고, 진시황을 그린 영화 「영웅」의 결론도 통일이 낫다였다. 발전은 유혈의 부산물이었지 유혈의 목적이 아니었다.
예송은 조선을 망치지 않았다. 값싼 내전이 가능할 만큼 체제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싸움의 비용이 아니라, 안정의 대가다. 체제가 효율적으로 돌아갈수록, 체제 밖의 질문은 도착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