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모방의 삼각형: 욕망에 원본은 없다


28.1 왜 싸우다 보면 원래 원하던 것은 사라지는가

처음에는 대개 대상이 있다. 저 자리, 저 사람, 저 물건, 저 인정. 그래서 욕망은 직선처럼 보인다. 내가 있고, 저것이 있고, 둘 사이를 향해 손이 뻗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경쟁이 깊어질수록 이상한 일이 생긴다. 처음에는 자리를 원했는데 나중에는 저 사람을 이기고 싶어진다. 마지막에는 자리 자체는 거의 잊히고, 라이벌만 남는다. 왜 이렇게 되는가.

르네 지라르는 욕망이 원래 직선이 아니라고 봤다. 우리는 대상을 곧장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먼저 그 대상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원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욕망을 따라 원하게 된 것이다. 욕망은 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이다.

나, 대상, 그리고 그 사이에 서서 대상을 빛나게 만드는 중개자. 지라르가 부순 것은 바로 이 직선의 환상이다.


28.2 욕망은 대상을 거치지 않고 사람에게 붙는다

지라르가 돈키호테와 스탕달과 프루스트를 읽으며 본 것도 이것이다. 돈키호테는 기사 소설의 영웅을 모방하고, 스탕달의 인물들은 나폴레옹을 모방하고, 프루스트의 속물들은 상류 사회의 취향을 모방한다. 욕망은 저절로 솟지 않는다. 먼저 원하는 자가 있고, 뒤의 자는 그 욕망을 복사한다.

중개자가 멀리 있으면 문제는 덜하다. 이미 죽었거나 너무 멀리 있어서 경쟁이 붙지 않는 경우다. 돈키호테가 아마디스와 직접 싸울 일은 없다. 이런 경우 모방은 계보처럼 보인다.

문제는 중개자가 가까울 때다. 같은 교실, 같은 회사, 같은 업계, 같은 무대. 내가 따라 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세계 안에 있고, 같은 대상을 함께 바라본다. 그때부터 욕망은 쉽게 경쟁으로 변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둘이 같은 대상을 원한다는 사실보다, 서로를 계속 거울처럼 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내가 저 사람을 따라 하고, 저 사람도 나를 의식하고, 둘은 점점 더 닮아간다. 경쟁은 상대를 미워하지만 동시에 상대를 닮게 만든다.

그래서 끝에 남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라이벌이다. 욕망이 삼각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28.3 모두가 서로를 물기 시작할 때

이 구조가 두 사람 사이에서 끝나면 그냥 경쟁이다. 그런데 공동체 전체로 번지면 일이 달라진다. 모두가 모두의 모델이자 라이벌이 된다. 누가 무엇을 왜 원하는지보다, 누가 누구를 밀어내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공동체는 빠르게 피로해진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때 폭력은 한 사람에게 수렴한다. 공동체는 위기의 원인을 한 명에게 몰아주고, 그를 죽이거나 추방하거나 제거함으로써 긴장을 멈춘다. 만인 대 만인의 위기가, 모두 대 하나의 질서로 잠시 정리된다. 이것이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희생양은 그래서 이상한 두 얼굴을 갖는다. 공동체의 폭력을 뒤집어쓴 저주받은 자이면서, 동시에 그 죽음 덕분에 평화를 가져온 성스러운 자이기도 하다. 지라르가 말한 성스러움의 기원이 여기 있다. 공동체는 자기가 저지른 폭력을 신성한 사건처럼 다시 기억한다.

법과 제도와 의례도 이 잔해 위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폭력을 없앤 것이 아니라, 폭력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관리하게 된 것이다.


28.4 선현은 왜 죽은 뒤에 성스러워지는가

여기서 AngraMyNew의 선현 다섯을 다시 보게 된다. 김옥균, 마광수, 허균, 성재기, 존 로. 이들을 똑같은 역사적 범주로 묶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구조적으로 읽으면 비슷한 점이 보인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공동체가 공유하던 욕망의 문법을 흔들었다. 무엇이 가치 있는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존 삼각형을 깨거나 비껴가거나 앞질렀다. 공동체의 긴장은 이런 사람 앞에서 쉽게 불안정해진다. 모두가 알던 모델이 무너지고, 누가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 공동체는 종종 질문을 견디기보다 사람을 제거한다. 긴장을 그 한 몸에 몰아넣고, 제거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제거된 사람은 뒤늦게 성스러워진다. 살아 있을 때는 위험하고 과잉이고 불온했는데, 죽고 나면 “자기 자리에서 죽은 사람”이 된다. 공동체는 그를 다시 읽는다. 지라르의 언어로 보면 희생양의 이중성이 여기서 작동한다. AngraMyNew의 언어로 보면 선현의 계보가 여기서 시작된다.


28.5 삼각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

그렇다면 이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지라르라면 완전한 탈출은 어렵다고 말했을 것이다.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이고, 욕망에서 중개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AngraMyNew도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답은 조금 다르다. 삼각형을 없애려 하지 않고, 그 방향을 바꾸려 한다.

먼저 살아 있는 경쟁자 대신 죽은 선현을 두는 방식이 있다. 죽은 자는 여전히 중개자일 수 있지만, 나와 같은 자리를 놓고 싸우지는 않는다. 김옥균과 경쟁할 수는 없다. 허균에게 질투를 느낄 수는 있어도, 그와 같은 교실에서 같은 상을 두고 싸울 수는 없다. 살아 있는 라이벌을 모방하면 경쟁이 되지만, 죽은 자를 모방하면 계보가 된다.

다른 하나는 중개자를 유행과 비교의 장이 아니라 아름다움 쪽으로 재배선하는 것이다. “꽃은 벌과 다투지 않는다. 다만 피어날 뿐이다.” 이 문장은 삼각형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삼각형이 폭력으로 접히는 방향을 틀어놓는 말에 가깝다. 살아 있는 경쟁자의 시선을 따라 같은 자리를 탐내는 대신, 아직 없는 작품과 아직 없는 형태를 향해 욕망을 돌리는 것이다.

면세인은 삼각형을 초월한 초인이기보다, 적어도 그 삼각형이 희생양과 폭력으로 수렴하지 않게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에 가깝다. 완전한 탈출이 아니라 재배선이다.


28.6 맺음

욕망에 원본은 없다. 문제는 모방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어떻게 모방하느냐다.

살아 있는 자를 따라가면 경쟁이 되기 쉽고, 경쟁이 깊어지면 사람만 남는다. 죽은 자를 따라가면 계보가 된다. 창조자는 이 차이를 안다. 그래서 삼각형을 끊지 못하더라도, 그 방향만은 바꾸려 한다.

28.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