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모방의 삼각형: 산 자를 따르면 경쟁, 죽은 자를 따르면 계보
— 선현은 왜 죽은 뒤에야 선현이 되는가
28.1 욕망은 직선이 아니다
사람은 대상을 곧장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먼저 그 대상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원한다. 르네 지라르는 이것을 삼각형이라 불렀다. 나, 대상, 그리고 대상을 빛나게 만드는 중개자. 욕망은 나와 대상 사이의 직선이 아니라, 중개자를 경유하는 삼각형이다.
이 삼각형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중개자가 가까이 있을 때 생긴다. 같은 교실, 같은 회사, 같은 무대에서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은 빠르게 서로의 모델이자 라이벌이 된다. 처음에는 자리를 원했는데 나중에는 저 사람을 이기고 싶어진다. 마지막에는 자리는 잊히고 라이벌만 남는다. 삼각형에서 대상이 빠지고 사람만 남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지라르의 진단이다. 이 글이 묻고 싶은 것은 그 다음이다. 중개자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에 따라 삼각형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면, 누구를 중개자로 두느냐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삼각형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택이다.
28.2 산 자를 따르면
살아 있는 중개자를 따르면 삼각형은 경쟁으로 접힌다.
내가 따라 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세계 안에 있고, 같은 자리를 놓고 움직인다. 나는 그를 모방하고, 그도 나를 의식하고, 둘은 점점 더 닮아간다. 경쟁은 상대를 미워하지만 동시에 상대를 닮게 만든다. 이 닮아감이 끝까지 가면, 공동체 전체가 서로의 모델이자 라이벌이 되는 상태가 온다. 모두가 모두를 물기 시작하면 긴장은 한 사람에게 수렴한다. 공동체는 위기의 원인을 한 명에게 몰아넣고, 그를 제거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한다.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이다.
희생양은 이상한 두 얼굴을 갖는다. 공동체의 폭력을 뒤집어쓴 저주받은 자이면서, 동시에 그 죽음으로 평화를 가져온 성스러운 자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자기가 저지른 폭력을 신성한 사건으로 다시 기억한다.
28.3 선현은 왜 죽은 뒤에 성스러워지는가
AngraMyNew의 선현 다섯을 다시 본다. 김옥균, 마광수, 허균, 성재기, 존 로. 역사적 범주가 같다는 뜻이 아니다. 공동체의 문법을 흔들고, 제거당하고, 사후에 성스러워지는 흐름이 겹친다는 뜻이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공동체가 공유하던 욕망의 문법을 흔들었다. 무엇이 가치 있는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존 삼각형을 깨거나 비껴가거나 앞질렀다. 공동체는 이런 사람 앞에서 쉽게 불안정해진다. 모두가 알던 모델이 무너지고, 누가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는 질문을 견디기보다 사람을 제거한다. 긴장을 그 한 몸에 몰아넣고 끝낸다.
여기까지는 비극이다. 그런데 그다음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제거된 사람이 뒤늦게 성스러워진다. 살아 있을 때는 위험하고 과잉이고 불온했는데, 죽고 나면 “자기 자리에서 죽은 사람”이 된다. 공동체가 자기 폭력을 신성한 기억으로 덮어쓰는 것이다.
선현의 이중성은 여기서 온다. 생전의 파괴자가 사후의 계보가 되는 전환은, 도덕적 재평가가 아니라 희생양이 남기는 이중 기억의 귀결이다.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와 같은 자리를 놓고 싸우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경쟁자가 죽은 선현이 되는 순간, 삼각형의 성격이 바뀐다.
28.4 죽은 자를 따르면
죽은 중개자를 따르면 삼각형은 계보로 펼쳐진다.
김옥균과 경쟁할 수는 없다. 허균에게 질투를 느낄 수는 있어도, 같은 교실에서 같은 상을 놓고 싸울 수는 없다. 죽은 자는 여전히 중개자이지만, 나와 같은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 그래서 모방이 경쟁으로 접히지 않고 방향으로 펼쳐진다. 저 사람을 이기고 싶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간 방향으로 내 길을 가겠다가 된다.
AngraMyNew가 살아 있는 아이콘 대신 죽은 선현을 두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살아 있는 인물을 중심에 놓으면 팬덤이 되고, 팬덤은 모방적 경쟁의 온상이다. 죽은 자를 놓으면 팬덤이 붙을 자리가 없다. 남는 것은 방향뿐이다.
다만 이것은 완전한 탈출이 아니다. 죽은 선현을 따르면서도 “누가 더 진정한 계승자인가”를 놓고 싸울 수 있다. 종교가 교파로 쪼개지는 과정이 정확히 이것이다 — 같은 선현을 모시면서 “누가 더 가까운가”로 싸운다. 삼각형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방향이 바뀌면 경쟁으로 접히는 속도가 늦춰진다.
28.5 한계
첫째, 선현이 죽은 뒤에야 계보가 된다는 흐름은 결과론의 위험이 있다. 살아 있을 때 제거한 것은 공동체의 폭력이었는데, 사후에 성스러워졌다는 서사가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읽힐 수 있다. 죽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식의 미화는 이 글의 의도가 아니다.
둘째, 살아 있는 자를 모방하면 반드시 경쟁이 된다는 것도 너무 단정적이다. 살아 있는 동시대인에게서 배우면서도 경쟁으로 접히지 않는 관계는 존재한다. 삼각형의 방향은 중개자의 생사보다 모방하는 자의 태도에도 달려 있다.
욕망에 원본은 없다. 삼각형은 없앨 수 없다. 다만 산 자를 따르면 경쟁이 되기 쉽고, 죽은 자를 따르면 계보가 되기 쉽다. 선현은 이 차이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