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지울수록 또렷해지는 것

— 재규격화군과 보편성


91.1 세부

더 작게 보면 더 정확해진다. 원자를 보고, 핵을 보고, 쿼크를 본다. 더 높은 에너지, 더 짧은 거리. 근본적 진리는 가장 작은 스케일에 산다는 전제.

양자전기역학(QED)이 이 전제를 따랐다. 전자와 광자의 상호작용. 파인만 도형으로 전개한다. 1차 근사는 실험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더 정밀하게 — 고차 보정을 계산하면 적분이 발산한다. 무한대. 더 자세히 보려 할수록 답이 폭발한다.

91.2 발산

무한대를 처리하는 방법이 있었다. 재규격화(renormalization). 발산하는 양을 관측 가능한 물리량 — 질량, 전하 — 에 흡수시킨다. 계산은 작동했다. QED의 이론적 예측은 소수점 아래 12자리까지 실험과 일치한다.

그러나 불편했다. 무한대가 나왔는데 관측량에 묻어서 지웠다. 계산은 되지만, 왜 되는지 설명이 없었다. 속임수가 아니라면, 왜 작동하는가.

91.3 흐름

케네스 윌슨(Kenneth Wilson)이 답했다. 1971년. 노벨 물리학상 1982년.

윌슨의 통찰: 물리 법칙은 스케일에 따라 달라진다. 원자 스케일에서 기술하는 물과 킬로미터 스케일에서 기술하는 물은 같은 물이지만 방정식이 다르다. 미시의 기술을 거시의 기술로 바꾸는 체계적 절차가 존재한다.

재규격화군(renormalization group). 엄밀히는 군이 아니라 반군(semigroup)에 가깝다 — coarse-graining은 비가역적이다. 지운 세부는 복원되지 않는다.

절차: 가장 작은 스케일의 자유도를 평균한다(coarse-graining). 남은 자유도로 같은 형태의 방정식을 다시 쓴다. 방정식의 매개변수(결합상수)가 바뀐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스케일이 커질 때마다 결합상수가 변하고, 그 궤적이 흐름(RG flow)을 이룬다.

재규격화가 작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부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스케일에 맞는 기술로 번역하는 것이다. 무한대는 버그가 아니었다 — 하나의 스케일로 모든 스케일을 기술하려 한 데서 오는 범주 오류였다.

91.4 고정점

흐름에는 종착점이 있다. 고정점(fixed point). 스케일을 바꿔도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지점.

물의 임계점. 374°C, 218기압. 액체와 기체의 구별이 사라진다. 이 근방에서 물의 물리량 — 비열, 감수율 — 은 멱법칙을 따른다. 임계지수(critical exponent).

자석의 퀴리점. 자발 자화가 사라지는 온도. 퀴리점 근방에서의 물리량도 멱법칙을 따른다.

물과 자석은 같은 보편성 클래스(universality class)에 속한다. 임계지수가 동일하다.

물 분자와 자기 스핀은 미시적으로 관련이 없다. 격자 구조도, 상호작용의 종류도 다르다. 그런데 같은 보편성 클래스에 속하는 시스템들은 임계점에서의 거동이 동일하다.

윌슨이 보인 것이 이것이다. 재규격화군의 흐름 아래서, 미시적으로 다른 시스템들이 같은 고정점으로 수렴한다. 보편성 클래스를 결정하는 것은 미시적 구성이 아니라 차원과 대칭 — 가장 거친 특성만이 종착점을 결정한다.

91.5 맺음

재규격화군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한대를 제거해서가 아니다.

세부를 지울수록 보편이 드러나는 구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시의 차이는 거시로 갈수록 사라지고, 사라진 자리에 보편성이 남는다. 물과 자석을 다르게 만드는 모든 세부는 고정점에 도달하면 무관해진다. 남는 것은 차원과 대칭뿐이다.

재규격화군의 언어로, 대부분의 세부는 irrelevant하다 — 흐름 아래서 사라진다. 그러나 relevant perturbation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정점의 궤도 자체를 바꾼다. 창조자가 심는 것이 이것이다 — 스케일이 바뀌어도 씻겨 나가지 않는 교란.

세부를 지울수록 다른 것들이 같아진다. 차이는 스케일의 산물이었다.

91.6 관련 문서

  • 뜻을 지운 자리 — 이상은 뜻을 지워 구조를 남겼다. 윌슨은 세부를 지워 보편을 남겼다
  • 라그랑지안 — 라그랑지안은 경로의 세부를 지우고 원리를 남긴다. 재규격화군은 스케일의 세부를 지우고 보편성을 남긴다
  • 일반상대성이론 — 아인슈타인은 힘을 지워 기하학을 남겼다. 윌슨은 미시를 지워 보편을 남겼다
  • 밀어내는 것들이 함께 흐르다 — BCS는 미시적 메커니즘이 거시적 상전이를 만든다. 재규격화군은 거시적 거동이 미시적 차이를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