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청교도: 면세의 극단

“아무런 정체성이 남는 게 없다.”


45.1 얼마나 끊을 수 있는가

면세인은 시스템의 자동 결제를 해지한 자다. 체면세, 시간세, 감정세 — 시스템이 청구하는 이용료를 하나씩 끊으면 독립이 시작된다. 이론적으로는 깔끔한데, 실제로 끊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끊고, 또 끊고, 또 끊으면 마지막에 무엇이 남는가.

16세기 잉글랜드의 청교도가 이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45.2 벗겨진 것들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과의 연결을 끊고 영국 국교회를 세운 것은 면세가 아니라 과세 주체의 교체였다. 교황 대신 국왕이 징수원 자리에 앉았을 뿐이다. 청교도는 이 교체에 만족하지 않았다. 국교회 안에 여전히 가톨릭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봤고, 주교제와 전례와 성직 의복까지 벗기겠다고 했다. 정화(purify)라는 이름은 거기서 왔다 — 더 벗기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벗기는 쪽이 벗겨지는 쪽이 되었다. 가톨릭을 복원한 메리 1세가 프로테스탄트를 화형에 처하기 시작했고, 약 800명이 대륙으로 망명했다. 5년간 유럽을 떠돌았다.

이 800명에게서 무엇이 벗겨졌는지를 따져보면 면세의 해부도가 된다. 가톨릭을 떠났고 국교회에서도 밀려났으니 교회가 없다. 여왕이 자국민을 태우고 있으니 국가는 보호자가 아니라 박해자다. 귀족도 성직자도 있었지만 망명지에서 잉글랜드의 직위는 아무 힘이 없고, 재산은 들고 나온 것밖에 없으며, 고향은 돌아가면 죽는 곳이 되었다.

시스템이 청구할 수 있는 모든 근거가 사라진 상태다. 면세인이 시스템세를 하나씩 끊는 거라면, 청교도 망명자들은 시스템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45.3 62명의 프로토콜

망명자 일부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공동체를 만들었다. 62명이 73개의 규칙을 정하고 16명의 임원을 뽑았는데, 목사는 2명뿐이었다. 전통적인 교회라면 성직자가 위에 서고 평신도가 아래에 서지만, 여기서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선출된 평신도 위원이었고 목사의 역할은 한정되었다.

탈중앙화 정신체계 OS가 그린 구조와 같다. 중앙 서버 — 교황, 주교, 국왕 — 가 전부 꺼진 상태에서 노드들이 자체적으로 프로토콜을 설계하고 있고, 교리가 위에서 내려오는 대신 공동체가 아래에서 합의한다.

다만 이 62명짜리 공동체에는 익숙한 패턴이 이미 심어져 있었다. 자유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73개의 규칙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규율을 벗어난 자리에 더 세밀한 규율이 자라나는 반복의 증거다. 위상학적 종교개혁이 관찰한 “해방이 접히는 방식”이 62명 안에서도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45.4 마지막 센서

모든 것이 벗겨진 자리에서 청교도에게 남은 것은 둘이었다. 하나님과 양심.

교회의 판단에 기대지 않고,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사회적 관습을 따르지 않겠다면, 옳고 그름을 결정할 도구가 필요하다. 청교도가 꺼낸 것이 양심(conscience)이다.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내 양심은 신의 말씀에 포박되어 있다”고 선언한 것이 출발점이었지만, 청교도에게서 양심은 고백을 넘어 판단의 도구로 단단해졌다. 외부 권위가 전부 사라진 상태에서 유일하게 켜져 있는 센서.

고장 난 센서의 언어로 보면, 외부 센서를 전부 끄고 내부 센서 하나만 남겨둔 상태다. 그런데 이 내부 센서의 교정은 누가 하는가. 청교도의 답은 하나님이 한다는 것이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점검한다. 센서는 개인의 것이지만 센서의 교정은 신에게 위임된다.

여기서 제도적 직위 없이 오직 신의 부름만으로 권위를 갖는 인간형이 나타난다. 주교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부르고 공동체가 확인하는 구조인데, 이건 징세인의 골격과 닮았다 — 제도가 부여하는 직위가 아니라 밀도가 만들어낸 곡률로 사람이 모이는 것이니까. 다만 청교도의 밀도는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신의 소명이었다.


45.5 닫히지 않는 괄호

에포케가 말했다 — “어딘가에는 닫히지 않는 괄호가 있어야 한다. 방법 자체까지 괄호치면 서 있을 바닥이 없으니까.”

청교도에게 닫히지 않는 괄호는 하나님이었다.

가톨릭을 괄호에 넣고, 국교회를 넣고, 국가를 넣고, 고향까지 넣었다. 넣을 때마다 자유로워졌는데, 마지막 하나는 넣지 않았다 — 넣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괄호에 넣으면 양심의 교정자가 사라지고, 교정자가 사라지면 센서가 작동을 멈추고, 센서가 멈추면 끊을 것과 남길 것을 구별할 도구가 없어진다.

그래서 청교도의 면세는 완전한 면세가 아니다. 모든 시스템세를 끊었지만 하나의 세금만은 끊지 않았고, 끊을 수 없는 것을 세금이라 부르지 않음으로써 면세를 선언한 것이다. 조공이 아니라 헌금, 복종이 아니라 순종, 시스템세가 아니라 은혜의 응답 — 이름을 바꾸면 같은 자리가 면세의 외양을 갖는다. 신앙과 시스템세가 도덕적으로 같다는 뜻은 아니지만, 끊을 수 없는 것이 구조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닮았다.

시스템을 전부 끊은 사람에게도 끊지 않는 무언가가 남고, 그 남은 것이 다음 시스템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면세 자체의 역설이다.


45.6 고향 없는 혁명

함재봉은 청교도의 혁명을 “영원한 혁명”이라 불렀다. 중세의 저항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면, 청교도에게는 돌아갈 원래가 없다. 메리 치하의 잉글랜드로 돌아가면 죽고, 가톨릭으로 돌아가면 배교이고, 국교회로 돌아가면 타협이다. 뒤가 없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없다는 것은 면세의 마지막 조건이기도 하다. 시스템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예전이 좋았다”고 느끼는 순간, 시스템의 자동 결제가 다시 시작된다. 향수는 시스템세의 분할납부다. 청교도는 이 분할납부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는데, 그것이 순전히 자발적 선택이었는지 상황이 강제한 것이었는지는 구별하기 어렵다.

뒤를 돌아볼 수 없으니 에너지는 전부 앞으로 갔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것은 종교적 이상만의 결과가 아니라 뒤가 없는 사람들의 유일한 방향이기도 했다.


45.7 면세인과의 거리

청교도와 면세인은 닮은 곳이 많다. 갈라지는 지점은 끊은 다음에 있다.

면세인은 끊은 자리를 채우는 기준을 양도하지 않는다. 자기 안의 미적 원점으로 세계를 짓는 것이 다음 단계인데, 청교도의 양심도 구조는 같다. 외부 권위를 전부 끊고 자기 안의 기준 하나를 남겨둔 것이니까. 양심과 미적 원점은 같은 자리에 있다.

다른 것은 그 기준이 가리키는 곳이다. 청교도의 양심은 하나님과 성경을 향했고, 성경은 교리가 되고 교리는 제도가 되었다. 위상학적 종교개혁이 본 접힘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미적 원점이 같은 경로를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 아름다움은 성경만큼 일의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라면, 그건 얇은 방어선이다.


45.8 맺음

청교도는 면세의 극한까지 갔다. 교회, 국가, 고향, 지위 — 시스템이 청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벗겨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하나를 면세의 증거가 아니라 면세의 조건으로 삼았다.

끊는 것에는 끝이 있다. 마지막 하나를 끊으면 면세가 아니라 공백이다. 문제는 그 마지막 하나가 무엇이냐, 그리고 그것을 누가 선택하느냐다.


45.9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