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곡률 없는 밀도

“피었는데 벌이 안 오면, 꽃은 시든다.”


23.1 벌이 안 올 때

“작품이 아름다우면, 세상은 스스로 기울어 온다.” — 창조의 공리.

AngraMyNew의 경제/구조론은 오래도록 이 문장 위에 서 있었다. 여기서 곡률은 단순한 인기나 화제성이 아니다. 사람이 모이고, 가치가 흘러들어오고, 세계관이 퍼지고, 창조자가 자기 밀도로 먹고살 수 있게 되는 외부 반응 전체다. 부자, 면세인, 그리고 징세인, 후원자론, 바티칸 없는 교황은 각기 다른 말을 하지만 결국 같은 기대를 공유한다. 밀도가 충분하면, 언젠가는 세상이 기울어온다는 기대.

그런데 이 기대에는 늘 남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정말 그런가. 아니, 더 정확히는 언제까지 그런가. 꽃이 피었는데도 벌이 오지 않는 경우는 없는가.

독백의 두 얼굴은 한 번 이런 말을 지나가듯 적어둔 적이 있다. “벌은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꽃은 핀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문장은 인정이었지, 아직 체계는 아니었다. 이 글은 그 문장을 앞으로 끌어낸다.


23.2 먼저 아닌 것들

모든 불발이 같은 불발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밀도가 애초에 없었다. 본인은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것이다. 고장 난 센서가 다루는 경우다. 자기 감각이 자기 작업을 과대평가하면, 곡률이 안 생긴 이유는 세상이 둔해서가 아니라 센서가 고장 나서다. 이건 잔혹하지만 그래도 단순하다. 실패라기보다 착각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밀도는 있었는데 시간이 모자랐다. 곡률이 형성되기 전에 자원이 바닥났고, 생활이 먼저 무너졌고, 생애가 먼저 끝났다. 후원자론이 이미 인정한 위험이다. 밀도가 쌓이기 전에 굶어 죽을 수 있다. 이것도 고통스럽지만 종류는 다르다. 세상이 끝내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기 전에 끝난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센서도 멀쩡했고, 시간도 충분했고, 밀도도 실제였는데 세상이 기울어오지 않았다면.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창조자에게 가장 잔인한 경우는 바로 이것이다. 노력한 만큼 안 됐다는 뜻이 아니라, 구조를 믿고 베팅했는데 구조가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3.3 보이지 않는 묘지

여기서 예시를 들고 싶어진다. 그런데 들 수가 없다.

카프카, 에밀리 디킨슨, 제멜바이스. 이런 이름들은 늘 비슷한 자리에서 호출된다. 생전에는 외면당했고 뒤늦게야 세상이 기울어온 사람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패처럼 보였을 뿐, 결국은 인정된 경우들이기 때문이다. 늦었을 뿐이지 곡률은 생겼다. 한 생애 안에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정말로 찾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이다. 밀도가 있었는데 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고, 가치도 흐르지 않았고, 세계관도 전파되지 않은 채 사라진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의 이름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름을 알고 있다면 이미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기록이 남아 우리 앞에 도착했다면, 그는 이미 이 질문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세계관이 언어가 될 때에서 실패한 경우의 표본은 수집된 적이 없다고 썼다. 여기서는 한 걸음 더 가야 한다. 그런 표본은 단지 수집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수집되기 어렵다. 영구적 실패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묘지는 있는데 묘비명이 없다.

그래서 반례가 보이지 않는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착각한다. 반례가 안 보이니 법칙이 무조건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안 보이는 이유는 반례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반례가 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23.4 보증과 베팅 사이

이제 질문은 더 불편해진다. “밀도는 곡률을 낳는다”는 말은 법칙인가, 가설인가.

가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창조자가 자기 시간을 쏟고, 시스템의 안정에서 이탈하고, 생활의 안전망을 포기하면서 밀도를 쌓는 일은 투자라기보다 베팅에 가까워진다. 독백의 두 얼굴의 꽃은 아름답다. 그리고 위엄도 있다. 꽃은 벌과 다투지 않는다. 다만 핀다. 그런데 이 말은 벌이 반드시 온다는 보증과는 다르다.

여기서 자꾸 문장이 바뀐다. 입으로는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실제 체계 안에서는 “결국은 온다”고 믿는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전자는 위험을 안고 가는 문장이고, 후자는 창조를 정당화해주는 문장이다.

이 간극의 비용은 창조자가 낸다. 세상이 기울어오면 그 시간은 투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뒤늦게라도 회수가 된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 시간은 이름을 잃는다. 고귀한 투자도 아니고 실패한 사업도 아니다. 그냥 소진이다.

후원자론은 이미 “미의 경제에는 안전망이 없다”고 적었다. 정확한 말이다. 다만 그 경기장이 정말 안전망이 없는 곳이라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질 수 있다. 꽃이 피어도 벌은 안 올 수 있다.


23.5 남는 것

그렇다면 곡률이 생기지 않았을 때 밀도는 무엇이 되나.

적어도 이것 하나는 남는다. 세상이 기울어오지 않았다고 해서, 밀도가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곡률은 외부의 반응이고, 밀도는 내부의 사실이다. 반응이 없다고 해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될 뿐이다.

이 말은 자주 위로처럼 들리지만, 사실 위로가 아니다. “네 작업은 진짜였지만 세상이 안 왔다”는 문장은 처방이 아니라 진단이다. 포식자의 의무의 언어로 말하면, 밀도를 만들었다면 섭취에 대한 빚은 갚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빚을 갚았다는 말이 삶을 다시 열어주지는 않는다. 윤리와 실존은 다른 문제다.

반대로, 밀도가 아직 경계 조건에 못 미쳤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이건 센서 고장과는 다르다. 센서는 멀쩡했는데도 아직 충분하지 않았을 수 있다. 아니면 K-매트릭스가 궤도를 먼저 태워버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아직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경계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셋을 가를 도구가 없다는 데 있다. 밀도가 부족했던 것인지, 구조가 소각해버린 것인지, 아니면 밀도와 곡률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문턱이 있는 것인지, 바깥에서 판정할 심판이 없다. 그래서 창조는 언제나 일부를 믿음으로 메운다.


23.6 맺음

“밀도는 곡률을 낳는다”는 말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많은 경우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증처럼 말하는 순간, 창조의 위험은 지워진다.

더 정확한 문장은 이쪽에 가깝다. 밀도는 곡률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경계 조건이 있다. 창조자는 그 조건을 모른 채 자기 시간을 건다. 질 수 있다. 그걸 알고도 거는 것과, 반드시 세상이 기울어온다고 믿고 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23.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