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K-매트릭스: 출구 비용의 사회
— 사람을 붙잡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출구 비용이다
45.1 모두가 안다
단일 궤도라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서울의 아파트, 대기업 또는 전문직, 자녀의 의대 진학 — 한국 사회에 궤도가 하나뿐이라는 진단은 이미 상식이다. 어디서든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궤도가 하나뿐이라서 입장료가 폭등하고, 에너지가 소진되고, 출산율이 바닥을 찍는다. 합계출산율 0.72명에 놀라는 사람은 이제 없다. 전원이 진단을 읽었다.
그런데 읽은 뒤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단을 읽은 사람이 궤도에서 내리지 않는다. 비율로 보면 오히려 더 매달린다. K-매트릭스가 단일 궤도의 사회라는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시스템의 정체를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진짜 질문은 다른 데 있다. 왜 다 알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가.
45.2 출구는 있다, 비용이 문제다
궤도 밖의 삶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방에서 적게 벌며 사는 사람이 있고, 퇴사 후 작업실을 꾸린 사람이 있고, 아이를 학원 대신 산에 데려가는 부모가 있다. 궤도 밖이 지도에 없는 것이 아니라, 지도에는 있되 요금표가 없을 뿐이다.
사람을 붙잡는 것은 궤도 밖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가는 데 드는 비용이 남는 비용보다 확실하게 크기 때문이다.
첫째, 매몰비용이 거대하다. 30년짜리 주택담보대출, 아이의 학군 이동, 배우자와의 생활 계약 — 궤도 위에서 이미 지불한 것이 많을수록 내리는 결정은 그 지불을 전부 손실로 확정하는 행위가 된다. 잘못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지금까지 투자한 것을 제로로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난이도의 결정이다.
둘째, 출구의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궤도 위에서는 연봉, 부동산 시세, 학교 이름이라는 계기판이 있다. 나쁜 계기판이지만 계기판이기는 하다. 궤도 밖에는 계기판 자체가 없다. 사람은 성과가 측정되지 않는 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출구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아무도 확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가는 것이 해방인지 추락인지 구분이 안 된다.
셋째, 주변이 출구를 막는다. K-매트릭스에서 가장 무서운 징세관은 국세청이 아니라 이웃이다. 궤도에서 내리려는 사람에게 먼저 달려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관계의 비용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는 충고가 아니라 인질극이다. 그리고 이 인질극에는 간수가 필요 없다. 종속자들이 서로를 감시한다.
이 세 비용이 합산되면, 인식은 행동을 바꾸지 못한다. 궤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궤도를 달리는 것 — 이것이 K-매트릭스의 실체다. 단일 궤도의 사회가 아니라, 출구 비용이 인식을 압도하는 사회다.
45.3 인식의 함정
여기서 한 번 더 꼬인다. 인식이 출구를 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인식 자체가 궤도를 강화한다.
“나는 K-매트릭스를 이해하고 있다”는 자각은, 시스템 밖에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 비판적 인식이 곧 면세의 시작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진단을 읽은 것과 자동 결제를 해지한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다. 체면세를 분석하면서 여전히 체면세를 내는 사람은 서류상 반체제이되 체감상 종속자다.
더 나쁜 경우도 있다. 진단이 체념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원래 이렇게 돌아가니까 어차피 못 바꾼다.” 시스템을 읽어낸 것이 시스템에 눌러앉는 논거가 되는 순간이다. 인식의 깊이가 체념의 깊이로 정확하게 환산된다. K-매트릭스는 비판까지 소화하는 시스템이다.
45.4 출구 비용이 0이 되는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출구 비용을 줄이면 사람들이 나가는가.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비용이 0이 되는 지점은 어디에도 없다.
궤도 밖에도 세금은 있다. 시스템의 인프라 — 의료, 교통, 통신, 안전 — 를 쓰면서 시스템만 욕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면세인은 시스템을 떠나는 자가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자동 결제를 끊는 자다. 인프라를 쓰되 체면세를 내지 않는 것. 이 구분이 중요하다.
출구의 방향도 중요하다. 궤도에서 내렸지만 끊은 자리에 자기 세계를 짓지 않으면, 절단은 있되 축조가 없는 상태로 남는다. 시스템에 치여서 에너지가 없어 쓰러진 것은 면세가 아니라 고갈이다. K-매트릭스가 만들어낸 가장 슬픈 산출물이다.
45.5 한계
첫째, 이 글은 한국 사회를 단일 프레임으로 읽는다. 궤도 위에서든 밖에서든 자기 세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이미 존재한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자동 결제를 해지한 자는 면세인이고, 궤도 밖으로 나갔어도 결핍에 시달리는 자는 여전히 종속자다.
둘째, 출구 비용은 계층마다 다르다. 자산이 있는 사람의 출구 비용과 없는 사람의 출구 비용은 같지 않다. “비용 때문에 못 나간다”는 분석이 모든 계층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궤도가 하나뿐이라는 것은 모두가 안다. 아는 것이 출구를 열지 못한다. 사람을 붙잡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나가는 데 드는 비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