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물고기에게 물을 보여줄 수 있는가

“상상력은 은총이 들어올 만한 모든 균열을 메워버린다.”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8.1 30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라. 30초가 지나기 전에 손이 주머니로 간다. 화면이 켜지고, 숏폼이 흐르고, 알림이 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신호 대기 중에, 잠들기 직전에. 빈 시간이 생기는 순간 무언가가 그 빈 시간을 채운다.

이것은 중독의 문제이기 전에 인간의 조건이다. 밖에서 들어오는 자극이 끊기면 뇌가 자기 쪽으로 돌아서는데, 그게 불편하다. 화면을 켜는 것은 그 불편을 끊는 가장 빠른 길이고,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빈 시간을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이 빈 공간을 허구(fiction)로 채운다고 말했다. 돈, 국가, 종교, 인권. 만져지는 실체가 아니라 같이 믿기로 한 이야기들이고, 이 이야기들이 충분히 오래 반복되면 이야기는 사라지고 세계 자체가 남는다.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인간은 허구 없이 견디지 못하는가. 이전의 이야기가 무너졌는데 다음 이야기가 아직 오지 않은 그 빈칸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가 이 빈칸을 똑바로 봤다. 그녀는 그것을 공허(vide)라고 불렀다. 사람은 이 공허를 못 견뎌서 곧바로 무언가로 메우려 들고, 권력은 바로 그 습관을 먹고 산다고 본 것이다. 베유는 그 메우기를 잠깐 멈추는 능력을 주의(attention)라 불렀다.

이 글은 베유의 철학 전체를 받아들이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중 한 가지를 딱 필요한 만큼만 가져와, 에포케가 열어놓은 자리에 놓기 위해 쓰인다.


8.2 물고기와 물

물고기는 물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비유로서는 정확하다. 물이 사라지는 순간에야 물고기는 물이 있었음을 안다. 숨이 막히는 그 순간에.

공허도 그렇다. 우리는 이 빈칸을 잘 못 본다. 너무 빨리 채워지기 때문이다. 30초의 빈 시간이 생기면 손이 화면을 켜고, 설명이 무너지면 새로운 설명이 즉시 깔리며, 이야기가 흔들리면 더 거친 이야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에게는 이 빈칸보다 그 위에 덮인 말이 먼저 보인다.

탈중앙화 정신체계 OS는 종교와 국가와 기업을 운영체제에 비유했다. 이 비유를 한 겹 더 밀면 이렇게 된다. OS가 진짜로 강한 건 특정한 설명을 자연스럽게 만들 때가 아니라, 그 설명이 막아 서고 있는 빈자리 자체를 안 보이게 만들 때다. “위계는 자연적이다”라는 문장의 가장 강한 힘은 그 문장이 참으로 느껴지는 데 있지 않다. 그 문장이 없으면 튀어나올 질문, “왜 이런 불평등이 존재하는가”가 애초에 안 떠오르게 만드는 데 있다.

플랫폼 경제는 이 구조를 장사로 만든다. 주의경제(attention economy)라는 이름이 정확한 것은 그래서다. 공허를 견디지 못하는 충동이 클릭을 만들고, 클릭이 데이터를 만들고, 데이터가 알고리즘을 훈련시키고, 알고리즘이 더 빈틈없이 빈칸을 메운다. 사람에게 자기를 둘러싼 조건을 돌아볼 틈조차 주지 않는 장치다.

면세인시스템세의 자동 결제를 해지한 자다. 그런데 해지하려면 먼저 결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장 난 센서는 “진단 도구가 고장의 당사자”인 상태를 다뤘고, 에포케는 “전제를 괄호 안에 넣으라”고 했는데, 두 글 다 한 가지를 빠뜨렸다. 괄호 안이 비었을 때 그 빈칸을 버티는 능력이다. 센서가 고장 났다는 걸 알았다 치자. 에포케로 전제를 괄호 안에 넣었다 치자. 그다음 괄호 안이 텅 비어 있는데 그걸 못 버티면 곧바로 다른 생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8.3 시몬 베유 — 물을 본 사람

베유는 1909년 파리에서 태어나 1943년 영국에서 34세로 사망했다.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했고, 1934–35년 알스톰과 르노 공장에서 미숙련 노동자로 일했으며,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자원병으로 참여했고, 2차 대전 중 런던에서 자유프랑스와 일하다가 결핵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주요 저작인 《중력과 은총》, 《뿌리의 필요》, 《신을 기다리며》는 대부분 사후에 출간되었다.

이 글이 베유에게서 가져오는 것은 한 가지다. 주의다. 그녀가 사람이 자기 바깥의 조건을 보게 하려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베유에게 주의는 집중력이 아니다. 집중은 힘을 주는 행위고 대상을 붙잡아서 처리하는 행위인데, 베유가 말하는 주의는 그 반대다. 힘을 빼는 것, 채우려는 충동을 거두는 것, 빈 공간을 빈 채로 두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음의 노력(effort négatif)이라고 불렀다. 힘을 주는 노력이 아니라 힘을 빼는 노력이라는 뜻이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정답을 억지로 구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문제를 그대로 보라, 그 불확실함을 버티는 것 자체가 주의의 훈련이라는 것이다. 《학교 공부의 올바른 사용에 관하여》에서 베유는 이 생각을 가장 또렷하게 풀어놓는다.

《중력과 은총》의 한 문장이 핵심을 찌른다. “상상력은 은총이 들어올 만한 모든 균열을 메워버린다.” 당연하던 것이 깨지면 사람은 곧바로 새 설명을 들이민다. 베유는 이 자동 메우기를 인간의 가장 깊은 습관으로 보았고, 주의란 그 습관을 잠시 멈추는 능력이라고 했다. 불편해도 그 빈칸을 조금 더 버티는 것.

에포케의 말로 옮기면 이렇다. 에포케는 전제를 괄호 안에 넣는 동작이고, 주의는 괄호 안의 공백을 견디는 능력이다. 후설은 괄호치기를 정의했지만 괄호 안에서 버티는 법은 말하지 않았다. 베유가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히 갈라야 한다. 이건 요즘 기업들이 파는 마인드풀니스와 다르다. 기업이 직원들에게 명상 앱을 깔아주는 이유는 직원이 뭔가를 깨닫게 하려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노동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조건에 대한 심리적 반응만 관리하는 것이다. 베유의 주의는 거기에 익숙해지는 쪽이 아니라, 그 조건 자체를 보는 쪽이다.


8.4 물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러면 공허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로운가. 아니다.

에포케가 “멈추지만 부수지 않는다”는 한계를 가졌듯, 주의도 한계를 갖는다. 본다고 해서 바꾸지는 못한다. 조건을 바꾸는 것, 자리를 옮기는 것, 아예 다른 삶의 바탕을 만드는 것은 별개의 작업이다.

택배 노동자의 브이로그를 ’감동 콘텐츠’로 소비하던 시선이, 공허를 견디는 순간 “이 피로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뀔 수 있다. “요양병원 노인의 방치는 고령화 사회의 불가피한 결과다”라는 매끈한 문장이, 채움을 유예하는 순간 재정 구조의 문제로 다시 보일 수 있다. 공허를 메우지 않고 견디면, 삭제된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새벽 4시에 상차 작업을 시작하는 손, 혼자 남은 식탁 위의 침묵, 배송 건수와 체력 사이에서 산술을 하는 몸.

그런데 본다고 바뀌지는 않는다.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이 조건을 의식하라”고 말하는 건 폭력이다. 시스템세를 알아차리는 것과 거기서 실제로 빠져나오는 것 사이에는 살림이 바뀌어야 하고, 이건 혼자 안에서 하는 작업으로는 닿지 않는다. 없으면 안 되지만, 있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능력이 없으면 낡은 설명이 깨져도 바로 새 설명이 들어선다. 해방이 아니라 OS 교체에 그친다. 혁명 다음 날 새 국가가 새로운 당연함을 만들고, 해방 운동 안에서 새로운 위계가 올라오고, 비판 이론 자체가 학계의 당연함이 되는 것이 그렇다.


8.5 물을 본 사람이 물에서 나오지 못한 이유

베유는 공장에 들어갔지만 노동자를 조직하지 않았고, 스페인 내전에 갔지만 3주 만에 돌아왔다. “힘은 인간을 사물로 만든다”고 썼지만 누가 누구를 어떻게 짓누르는지는 끝까지 좇지 않았다. “고통받는 자에게 주의를 기울여라”라고 했지만 그 고통받는 자는 살아 있는 이름이라기보다 철학 속 범주에 가까웠다. 결국 그녀의 실천은 혼자 안에서 도는 쪽에 머물렀다.

더 뼈아픈 건 자기 자신이다. 점령된 프랑스와 같은 양만 먹겠다고 고집하다 영양실조로 죽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밥을 거부하는 버릇이 있었다. 자기를 비우는 영적 실천이라고 불렀지만, 자기 파괴에 이름만 바꿔 붙인 것은 아닌지 모른다. 남을 볼 때만 예리하고 자기한테는 흐려졌다면, 그건 고장 난 센서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 경우다.

베유는 남이 깔아놓은 생각이 사람을 어떻게 붙잡는지는 선명하게 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기 삶도 세상도 바꾸지 못했다. 가져올 것은 한 가지고, 그 생각이 가야 할 곳은 그녀가 가지 못한 곳이다.


8.6 맺음

물고기에게 물을 보여줄 수 있는가.

완전히는 아니다. 인간이 공허를 견디지 못하는 종인 한, 채움의 충동은 언제나 다시 작동한다. 혁명 뒤의 국가는 새 당연함을 만들고, 해방 운동 안에서도 새 질서가 굳고, 비판 자체가 또 하나의 교과서가 된다.

그러나 잠시 보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채움의 속도를 늦추고, 빈칸이 드러나는 순간을 견디고, 그 뒤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듣는 것. 혼자 본 것은 오래 안 간다. 누군가가 본 것을 옆 사람에게 말하고, 그 말이 언어가 되고 운동이 되고 제도에 닿을 때, 비로소 보는 일이 바꾸는 일로 이어진다. 해방이 상태가 아니라 방향이듯, 이것도 한 번 해놓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다시 안 보이게 될 때마다 다시 해야 한다.


8.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