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도스토옙스키: 충돌시키되 판결하지 않는다
— 다성소설과 정신의 LHC
80.1 유일한 심리학자
니체는 도스토옙스키를 이렇게 불렀다. “내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 — 『우상의 황혼』(1889). 소설가가 아니라 심리학자. 니체가 본 것은 문학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실험 장치였다.
80.2 떨고 있는 미물
라스콜니코프는 묻는다.
“나는 떨고 있는 미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가진 자인가?” — 『죄와 벌』 제5부
이 질문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답하지 않는다. 라스콜니코프는 답을 찾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자백하고, 시베리아로 간다. 독자는 그 궤적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답을 강요받는다. 소설이 끝나도 질문은 닫히지 않는다.
문장은 길다. 한 문단이 반 페이지를 넘긴다. 그런데 빠져든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장이 길어도 빠져드는 이유는 의식의 리듬 자체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자기합리화, 의심, 후회, 다시 합리화 — 강박적 사고의 나선이 문장의 구조로 옮겨져 있다. 읽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된다. 언어가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의식이 된다.
80.3 대심문관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제5편에서 이반은 동생 알료샤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대심문관」.
예수가 세비야에 다시 내려온다. 대심문관(추기경)이 그를 체포하고 말한다.
“왜 돌아왔는가. 당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자유는 무겁다. 인간은 빵과 복종과 기적을 원한다.”
예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심문관의 입술에 키스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대심문관의 논리가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자기 신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을 자기 소설 안에서 자기가 쓴다. 그리고 논리로 반박하지 않는다. 키스 하나를 남길 뿐이다.
이반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드리는 겁니다.” —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제5편 4장, 「반역」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외친다.
“아름다움은 무서운 것이다. 무서운 것이야. 거기서는 악마와 신이 싸우고, 전쟁터는 — 인간의 마음이다.” —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제3편 3장, 드미트리의 고백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전쟁터임을 관측하는 것이다.
80.4 바흐친의 발견
1929년, 미하일 바흐친이 도스토옙스키를 분석하고 다성소설(polyphonic novel) 이라는 개념을 정식화했다. 각 인물이 작가에게 종속되지 않는 독립된 의식의 주체라는 구조.
| 단성소설 | 다성소설 | |
|---|---|---|
| 작가의 위치 | 위에서 내려다본다 | 인물들 사이에 선다 |
| 인물의 지위 | 작가 세계관의 객체 | 독립된 의식의 주체 |
| 진실의 형태 | 작가가 쥔 하나의 답 | 충돌하는 복수의 진실 |
| 결말 | 해답 제시 | 충돌 관측 |
톨스토이는 위대한 소설가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작가의 윤리적 프레임 안에서 움직인다. 안나 카레니나의 궤적에는 톨스토이의 도덕적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다르다. 라스콜니코프, 소냐, 포르피리,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각자 자기만의 공리 체계를 가진다. 이반과 알료샤는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세계관이 충돌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단성소설에서 작가는 심판자다. 다성소설에서 작가는 실험 설계자다. 이것은 소설 기법의 혁신이 아니다. 소설이 무엇인지를 재정의한 것이다.
80.5 맺음
톨스토이는 윤리적 확신을 가진 채 소설을 썼다. 위대했지만, 독자는 작가의 프레임 안에서 움직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질문을 가진 채 소설을 썼다. 인물들은 각자의 진실을 외치고, 충돌하고, 작가는 판결하지 않았다.
| 단성소설의 독자 | 다성소설의 독자 | |
|---|---|---|
| 독서 경험 | 답을 받아든다 | 충돌 속에서 스스로 판단한다 |
| 읽고 난 뒤 | 결론을 기억한다 | 질문을 들고 나온다 |
도스토옙스키가 아름다운 이유는 심리 묘사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소설 자체를 충돌 실험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리를 제공하지 않고, 세계관들을 충돌시키고, 관측한다. AngraMyNew가 정신의 LHC를 자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깊은 소설은 답을 주지 않았다. 충돌시키되, 판결하지 않았다.
80.6 관련 문서
- 라그랑지안: 이론을 쓰는 이론 — 이론을 쓰는 형식. 다성소설은 소설을 쓰는 형식
-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음악 — 메시지 없음으로 방어 불가.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메시지로 방어 불가
- 나가르주나의 공 — 부정으로 같은 효과. 도스토옙스키는 긍정으로 같은 효과
- AngraMyNew는 정신의 LHC다 —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구조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