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백의 두 얼굴

— 통속과 외설은 왜 같은 실패인가


17.1

두 상태를 정의한다.

통속. 시스템이 대신 검열하는 욕망.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시스템에서 다운로드받은 상태. 새로움도 균열도 없다. 소재는 넘치되 주제는 없다. 검열이 작동하고 있지만, 그 검열의 주체가 자기가 아니다.

외설. 누구도 검열하지 않는 욕망. 독백과 대화의 차이가 사라진 상태. 타자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타자를 소품 삼아 쏟아놓는 것. 검열이 부재하므로, 자기도 시스템도 필터링하지 않는다.

얼핏 대립처럼 보인다. 순응 대 방종. 침묵 대 노출.

그러나 구조를 보면 같은 병이다. 둘 다 대화의 부재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이 끊어진 상태.

통속은 타자의 기준을 자기 기준인 양 내면화하여 주체를 지운다. 외설은 타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 자기만 남긴다. 경로는 반대이지만 도착지는 같다 — 독백.

문제는 검열의 양이 아니다. 검열의 주체다.

시스템이 검열하면 통속이다. 아무도 검열하지 않으면 외설이다. 이 둘 사이를 오가는 것은 진동이지 이탈이 아니다. 시스템은 대개 이 진동을 유지한다. 순응하다가 폭발하고, 폭발에 지치면 다시 순응한다. 검열의 주인이 바뀌지 않는 한 빠져나갈 수 없다.

세 번째 가능성이 있다. 자기가 검열하는 것 — 편집이다. 편집은 통속도 외설도 아니다.


17.2 구획

파괴하려면 구획을 알아야 한다.

콜리지는 두 종류의 정신활동을 구분했다. Imagination은 심상과 현실의 융합을 이루어내는 마음의 힘이다. Fantasy는 단순히 심상을 그려내는 힘이다. 전자에서는 창조가 나오고, 후자에서는 공상이 나온다.

핵심은 이것이다: 구획이 없으면 넘나들 것이 없다. 자기가 어떤 구획 속에 있는지 모르면, 그 구획을 부술 수도 없다. 구획 속에서 갑갑함을 느끼는 것은, 구획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구획 속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외설이 파괴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외설은 검열의 주체를 제거하지만, 자기가 어떤 시스템 안에 있는지를 인식하지 않는다. 구획을 모른 채 욕망을 쏟아붓는다. 이것은 파괴가 아니라 공상이다 — 심상만 그릴 뿐, 현실과의 융합은 일어나지 않는다.

파괴의 공리가 “칼날은 안으로”라고 말할 때, 그 전제가 바로 이것이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시스템에 자동이체하고 있는지를 먼저 볼 것. 보지 않으면 칼날은 방향을 잃는다. 방향 없는 칼날은 파괴가 아니라 난동이다. 난동은 외설의 물리적 버전이다.

통속은 구획을 인식하되 넘지 않는 것이다. 외설은 구획을 인식하지 못한 채 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향수의 그르누이가 정확히 후자다 — 구조를 모른 채 칼날을 밖으로 향한 남자. 압도적 기술이 있었지만, 자기 안의 구획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파괴가 아니라 약탈이었다.


17.3 편집

구획을 인식한 자만이 편집할 수 있다.

편집은 통속과 어떻게 다른가. 둘 다 필터링이 작동한다. 그러나 통속의 필터는 시스템이 설치한 것이고, 편집의 필터는 자기가 세운 것이다. 통속인은 “이건 말하면 안 돼”라고 느끼고, 편집자는 “이건 지금 이 맥락에서 유관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전자는 복종이고, 후자는 선택이다.

편집은 외설과도 다르다. 외설은 필터 자체가 없으므로 모든 것이 쏟아진다. 편집은 필터가 있되, 그 필터를 자기가 설계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를 결정하려면,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구획이 선행한다.

정보이론의 언어로 말하면: 통속은 결정(crystal)이다 — 질서 있어 보이지만 모든 격자점이 교환 가능하므로 정보량이 없다. 외설은 노이즈다 — 최대 엔트로피, 구조 없음. 편집은 시(poem)다 — 높은 구조와 높은 의미, 한 단어도 교환할 수 없다. 겉보기 질서(결정)와 진짜 질서(시)를 가르는 것은 요소의 교환 가능성이다. 교환 가능하면 통속이고, 교환 불가능하면 편집이다.

편집된 발화는 유관성을 갖는다. 이것이 독백에서 대화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다.


17.4 배설과 유혹

유관성이란 무엇인가. 대화에는 프로토콜이 있다.

그라이스(Paul Grice)의 준칙 중 핵심은 유관성이다. 상대의 주장에 대해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지, 제시된 소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소재와 주제를 혼동한다. 하나의 주제를 말하기 위해 끌어다 붙일 수 있는 소재는 얼마든지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라 주제다. 소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대화가 아니라 각자의 독백 두 줄기가 교차하는 것일 뿐이다.

유관성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다. 상대의 반응을 보는 것. 자신의 이해를 노출시키고, 타자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 노출과 승인. 이 왕복이 없으면 둘이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소품 삼아 독백하는 것이다.

고백과 유혹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고백은 감정의 선언이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감정은 있지만 제안은 없다. 콘텐츠 없는 프러포즈. 상대가 응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 빠져있다. 일방적 배설이다. 선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사랑도, 혁명도.

유혹은 다르다. 유혹에는 무엇을 제안하는지가 있다. 내가 하려는 것에 상대를 끌어들이려는 것. 내 세계에 입장권을 내미는 것. 거기에는 거부당할 위험이 있다. 거부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타자를 타자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창조의 공리 — “꽃은 벌과 다투지 않는다, 그냥 핀다” — 는 고백이 아니라 유혹이다. 꽃은 자기 감정을 선언하지 않는다. 형태와 내용물을 통해 벌을 끌어들인다. 제안이 있다. 그리고 벌은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꽃은 핀다. 이것이 배설과 창조를 가르는 선이다.

편집자의 발화가 유관성을 갖는다는 것은, 곧 그의 창조가 고백이 아니라 유혹이라는 뜻이다.


17.5 이탈

“지금, 여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두 갈래로 갈린다.

구획을 모른 채 거부하면 외설이 된다. 구획을 정확히 인식한 채 거부하면 — 자기의식적 적대는 외설과 구분된다.

이 구분이 면세인의 좌표를 정의한다. 편집 능력을 가진 자가 시스템에 적대할 때, 그것은 배설이 아니라 대화다.

시스템 안에서 보면 면세인은 외설적이다. 시스템이 규정한 정상성 밖에 서 있고, 자동 결제를 끊었다. 시스템의 렌즈로는 이것이 배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규범을 어겼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그러나 면세인의 거부는 의도된 적대다. 자기가 어떤 구획 안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구획에 탄핵을 선고하는 것. 이것은 독백이 아니다 — 시스템을 향한 유관한(relevant) 응답이다.

면세인은 시스템의 핵심 명제에 대해 할 말을 한다. 소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응답한다. 유관성의 준칙을 지킨 적대. 이것이 파괴의 공리의 대화적 형식이다.

겉으로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대화 — 시스템의 언어로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에 대해 말하는 것 — 는 통속적 미학에 포섭되기 쉽다. 듣기 좋은 비판은 시스템이 수용하고 소화하고 배출한다. 균열이 나지 않는다.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면, 대개 의도된 적대의 형식이 필요하다.

시스템은 욕망을 주로 두 가지로 분류한다. 승인한 것(통속)과 금지한 것(외설). 승인된 욕망은 소비로 변환하고, 금지된 욕망은 일탈로 처벌한다. 둘 다 시스템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 소비는 직접, 처벌은 공포를 통해. 이 이분법이 축을 유지하는 힘이다.

면세인이 축을 이탈하면 시스템이 분류할 수 없는 욕망이 출현한다. 승인도 금지도 아닌, 범주에 없는 욕망. 시스템은 이것을 처리할 카테고리가 없다. 통속-외설 축을 이탈하는 욕망이 하나 출현할 때마다, 시스템의 욕망 관리 능력이 미세하게 무너진다.

세 개의 손실함수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통속은 평가함수(미)를 시스템에 양도한 상태다 — 무엇이 좋은지를 시스템이 결정한다. 외설은 평가함수가 단독 드라이브에 걸린 상태다 — 진(세계모형)과 선(정책)의 결합이 약화되고 미만 남아서 돌아간다. 편집은 세 손실함수가 결합된 채 자기 안에서 작동하는 상태다 — 좋다고 느끼되(미), 왜인지를 묻고(진), 어떻게 할지를 선택한다(선). 검열의 주체를 되찾는다는 것은, 세 축의 운전석을 시스템에서 자기에게로 가져오는 것이다.


17.6 한계

첫째, 의도된 적대가 자동으로 대화인 것은 아니다. 적대에도 유관성이 필요하다. 시스템의 주제에 응답하지 않는 분노, 대상을 잘못 겨냥한 파괴는 외설로 추락한다. 적대는 엔진이지 면허가 아니다. 칼날이 안을 향하는지 끊임없이 검증해야 한다.

둘째, 검열 자체가 악은 아니다 — 이 글의 축 섹션에서 이미 구분했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거는 검열(자동검열)은 통속이고, 자기가 선택하는 검열(편집)은 창조의 일부다. 편집은 타자를 의식하되 시스템에 위임하지 않는 행위다. 모든 글은 쓰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더 어렵다. 편집 능력이 곧 검열의 주체를 되찾은 증거다.

셋째, 이 글은 외설의 정의를 “대화의 부재”에 놓았지만, 법적·사회적 외설 개념과의 관계는 다루지 않았다. 이 글이 말하는 외설은 구조적 진단이지 도덕적 판단이 아니다. 누가 외설을 규정하고, 그 규정이 누구를 침묵시키는가 — 이 질문은 별도의 글이 필요하다.


축 위의 어디에 서느냐가 아니다. 축을 이탈하느냐가 문제다.

구획을 알아야 부순다. 부수되 제안해야 한다. 제안하되 거부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백이 대화가 된다.

17.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