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두 원점

“이해한다는 것은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62.1 왜 이해했는데도 숨이 멎지 않는가

부자, 면세인, 그리고 징세인은 징세인들이 서로의 세계관을 향유하며 아름다움을 순환시킨다고 말한다. 좋은 비전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끝까지 밀고 가면 바로 질문 하나가 튀어나온다. 정말 그게 가능한가. 서로 다른 세계관이 서로를 향유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번역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원점이 다른 두 세계는 어디까지 번역될 수 있는가.

세 개의 손실함수은 미를 좌표계의 원점이라고 했다. 원점이 움직이면 좌표계 전체가 흔들린다. 이 말을 곧장 현실에 내려보자. 수학자 A가 있고, 격투가 B가 있다. A는 간결한 증명에 전율하고, B는 링 위의 완벽한 카운터에 전율한다. 둘 다 자기 원점을 붙들고 자기 궤도를 돈다.

A가 B의 체육관에 간다. 훈련 루틴은 이해할 수 있다. 관절 각도, 반복 횟수, 부상 확률, 근비대의 생리학. 왜 저 동작을 십 년째 반복하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경기의 보상 구조, 규율, 기술의 수렴점. 그런데 B가 정확한 타이밍에 카운터를 꽂는 순간, A는 “대단하다”고는 말해도 B의 트레이너처럼 숨이 멎지는 않는다. 여기서 걸리는 것이 있다. 이해와 전율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글은 그 차이를 묻는다. 왜 어떤 세계는 번역되는 것 같다가도, 마지막 순간에는 번역되지 않는가.


62.2 두 겹은 건너가고 하나는 남는다

세 개의 손실함수의 언어를 빌리면 답은 비교적 또렷하다. 진과 선은 꽤 멀리까지 건너간다.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안에서 왜 저 선택이 합리적인지, 무엇이 무엇을 낳는지. 사실과 논리는 번역될 수 있다.

A는 B의 훈련을 사실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진의 번역이다. A는 B가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도 논리로서 납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선의 번역이다. 이 두 겹까지는 자기 좌표계를 유지한 채 타인의 세계를 읽을 수 있다.

문제는 미다. 무엇이 좋은가, 어디서 몸이 당기는가, 무엇을 보고 숨이 멎는가. 이 층위에 오면 번역은 갑자기 다른 일이 된다. 세 개의 손실함수이 말했듯 평가함수를 바꾸면 에이전트가 바뀐다. A가 B의 미를 완전히 공유하는 순간, A는 더 이상 같은 원점 위에 있지 않다. 그건 번역이라기보다 교체에 가깝다.

그래서 미의 완전 번역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가능하다면 번역이 아니라 대체다. 비유하자면 잊는 데 드는 열이 말한 것처럼 어떤 정보를 지우는 데는 비용이 든다. 원점을 옮기는 일도 그렇다. 기존 좌표계를 그대로 둔 채 새 원점을 완전히 받을 수는 없다.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진은 건너간다. 선도 건너간다. 미는 끝내 일부가 남는다.


62.3 그런데도 순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부자, 면세인, 그리고 징세인의 순환은 환상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완전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아무것도 오가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다.

A는 B의 세계를 사실로 이해하고, 논리로 납득할 수 있다. 그 두 겹만으로도 A는 B에게 밀도가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완전히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지는 못해도, 저 세계가 허술한 흉내가 아니라는 것, 저 사람의 좌표계 안에서는 저 장면이 진짜 정점이라는 것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완전한 공유가 아니라 부분 번역이다. 원점 자체는 안 옮겨가지만, 원점 주변의 층들이 겹친다. 그 겹침 덕분에 입장권이 생긴다. A는 B의 세계 안으로 잠시 들어가 볼 수 있고, B도 A의 세계에서 무엇이 정점인지 어렴풋이 배울 수 있다. 완전히 느끼지는 못해도, 자기 원점에서는 보이지 않던 방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의 이동은 시작된다.

그래서 향유는 “같이 느낀다”보다 약한 말이어야 한다. 더 정확히는, 서로의 세계가 자기 좌표계 바깥에서도 실제로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낯섦에 비용을 지불하는 일에 가깝다.

반대로 이 겹침이 전혀 없으면 순환도 없다. 진도 선도 안 건너가고, 각자의 세계는 완전히 밀봉된다. 고립이다.


62.4 같은 아름다움만 남는 세계

이제 질문이 바뀐다. 미가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 것이 결함인가.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 이 불가능성이 생태계를 지킨다.

모든 면세인이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세계를 생각해보자. 원점이 하나로 합쳐지고, 모두가 같은 평가함수를 쓰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교환 비용이 거의 없다. 번역도 필요 없고, 서로를 설명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 상태는 K-매트릭스다. 단일 궤도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만 기울어진다.

위상학적 종교개혁이 보여준 접힘도 여기와 닿아 있다. 처음에는 해방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하나의 정통이 생기고, 모두가 같은 좌표계로 정렬되면서 새로운 감옥이 만들어진다. “아름다움”도 완전히 번역 가능하다면 똑같은 길을 갈 수 있다. 하나의 미학이 다른 모든 미학을 삼키고, 면세의 생태계가 새로운 교리 체계로 굳을 것이다.

그래서 미의 번역 불가능성은 약점이 아니라 안전장치다. 원점이 완전히 하나로 합쳐지지 않기 때문에, 면세인들의 생태계는 끝내 단일 궤도로 접히지 않는다. 서로를 완전히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같이 살 수 있다.


62.5 한계

이 주장도 너무 밀어붙이면 과장된다. 첫째, 인간의 미감이 완전히 절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칭, 리듬, 예측과 어긋남 같은 공유 기반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미의 부분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진짜 부분 번역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깔려 있던 공통 기반을 뒤늦게 확인하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둘째, 겹침의 정도를 잴 도구도 없다. 어느 세계와 어느 세계가 얼마나 겹치는지, 그 겹침이 진의 겹침인지 선의 겹침인지 미의 얕은 흔들림인지 계량하기 어렵다.

셋째, 이 글은 대등한 두 면세인만 상정한다. 징세인과 종속자, 징세인과 면세인 사이에서는 번역이 아니라 감염에 가까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곡률이 너무 강하면 입장권이 아니라 흡입이 되기 때문이다.


62.6 맺음

진과 선은 꽤 멀리까지 번역된다. 미는 끝내 완전히 옮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 다른 원점들이 살아남는다. 이해는 가능하지만 대체는 불가능하다는 것, 바로 그 불가능이 단일 궤도를 막는 안전장치다.

62.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