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프로듀서론: 타인의 세계로 먹고사는 자
— 문제는 먹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먹느냐다
59.1 타인의 밀도로 먹는다
프로듀서는 자기 밀도로 먹는 사람이 아니다. 타인의 밀도가 세상에 도착하는 경로를 만들고, 그 경로에서 먹는 사람이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직시해야 하는 관계다. 창조자가 세계를 만들면 프로듀서는 그 세계가 관객에게 도착하는 회로를 설계한다. 가격표를 세우고, 계약을 정리하고, 무대를 열고, 정산의 루프를 깐다. 그리고 그 회로에서 자기 몫을 가져간다. 후원자가 공명에 돈을 내는 사람이라면, 프로듀서는 공명이 흐를 배관을 깔고 그 배관의 유지비로 먹는 사람이다.
“그러면 창조자가 직접 하면 되지 않느냐.” 직접 가격표를 붙이고, 직접 영업하고, 직접 협상하면. 얼핏 맞는 말 같지만, 세계를 만드는 기관과 세계를 유통하는 기관이 같은 몸 안에서 경쟁하면, 먼저 마르는 것은 창조다. 속물이 돼서가 아니라, 에너지가 작품 바깥에서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듀서는 존재해야 한다. 문제는 존재 여부가 아니라 위치다.
59.2 낙차에서 먹는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때 낙차가 생긴다. 프로듀서는 그 낙차에서 먹는다. 밀도 자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밀도가 세상에 도착하면서 만드는 에너지의 일부를 가져가는 것이다.
이 위치가 정당한 이유는 단순하다. 낙차가 없으면 밀도는 움직이지 않는다. 서랍 안에 머문다. 프로듀서가 회로를 깔아야 밀도가 흐르고, 흐를 때 비로소 창조자도 먹고 프로듀서도 먹는다. 터빈도 유지비가 든다.
좋은 프로듀서일수록 보이지 않는다. 회로가 완벽하게 작동하면 관객은 아티스트만 보고, 아티스트도 자기가 해낸 것처럼 느낀다. 프로듀서의 성공이 프로듀서의 존재 증거를 지운다. 이것은 불공정이 아니라 원래 그런 자리다. 보이지 않는 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은 이 관계의 극단이다. 29살에 처형됐고, 권력도 군대도 없었다. 남긴 것은 쇼카손주쿠라는 작은 학당 하나뿐인데, 거기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다카스기 신사쿠가 나왔다. 메이지 유신의 설계자들이다. 쇼인은 근대 일본을 직접 만들지 않았다. 만들 사람이 세상에 도착하게 만들었고, 자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59.3 자리를 먹으면
프로듀서의 타락은 먹는 위치가 바뀔 때 시작된다. 낙차에서 먹던 사람이 자리를 먹기 시작하면, 프로듀서는 포주가 된다.
자리를 먹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창조자의 밀도를 시장이 원하는 형태로 깎아낸다. 관객이 좋아할 장면만 남기고, 말투를 교정하고, 표정을 통제하고, 알고리즘이 좋아하는 형식으로 잘라낸다. 회로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밀도를 규격품으로 가공하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프로듀서는 터빈이 아니라 두 번째 징세관이 된다.
더 미묘한 타락도 있다. 밀도를 깎지는 않지만, 창조자의 이름 옆에 자기 이름을 세우기 시작하는 것. 회로를 깐 사람이 회로 위에 올라서서 자기가 주인공인 척하는 것. 낙차에서 먹던 사람이 밀도 자체를 자기 것으로 환전하려는 순간이다.
경계는 단순하다. 창조자의 밀도가 훼손되지 않고 세상에 도착했는가. 프로듀서가 빠져도 밀도는 그대로 남는가. 이 두 질문에 “그렇다”이면 낙차에서 먹은 것이고, “아니다”이면 자리를 먹은 것이다.
59.4 한계
첫째, “밀도를 지킨다”와 “밀도를 다듬는다”의 경계가 언제나 선명한 것은 아니다. 편곡을 바꾸는 것은 보호인가 가공인가. 타이틀곡을 고르는 것은 회로 설계인가 밀도 개입인가. 현실의 좋은 프로듀서는 대부분 창조자이기도 해서, 두 역할이 한 몸에서 섞인다. 이 글은 원칙을 세울 뿐, 모든 경계 사례에 답하지는 못한다.
둘째, 낙차에서만 먹으라는 원칙이 경제적으로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다. 시장이 작으면 낙차 자체가 작고, 낙차가 작으면 프로듀서가 살아남을 수 없다. 원칙은 세울 수 있지만, 원칙만으로 밥이 나오지는 않는다.
프로듀서는 타인의 밀도로 먹는 자다. 낙차에서 먹으면 프로듀서고, 자리를 먹으면 포주다. 잘 먹을수록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