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창세기전: 뫼비우스 위의 앙그라마이뉴

— 닫힌 원이 열린 나선이 되는 구조


75.1 허구가 먼저였다

한국의 RPG가 우주론을 만들었다. 창세기전. 1995년에 시작되어 2001년에 끝난 시리즈로, 원래 2편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6년에 걸쳐 세계관이 쌓였고, 끝났을 때 남아 있던 것은 게임이 아니라 우주의 순환 구조였다.

75.2 앙그라마이뉴와 스펜타마이뉴

안타리아의 별이 죽어간다. 100년 후 초신성 폭발. 멸망은 확정되어 있다. 이 멸망 앞에서 하나의 현상이 발동한다 — 앙그라마이뉴. 모든 생명체의 영자(靈子)가 행성의 코어로 모인다. 조건은 두 가지, 충분한 죽음과 코어에 가해지는 순간적 에너지. 멸망이 그 조건을 충족시킨다.

코어에 모인 영자는 새 행성으로 날아가고, 그곳에서 흩어져 생태계가 재구성된다. 스펜타마이뉴. 파괴와 창조가 대립하지 않는다. 같은 사건의 두 이름이다.

75.3 뫼비우스

영혼이 날아간 그 행성의 이름은 아르케. 아르케에서 인류는 다시 번성하고, 수십만 년 후 대우주 개척시대를 열어 오딧세이호를 블랙홀 너머로 보낸다. 오딧세이호는 170만 년 전의 행성에 도착하고, 생존자들은 그곳을 안타리아라 이름 붙인다.

안타리아에서 문명이 다시 시작된다. 신들의 시대, 라그나로크, 제국의 흥망. 그리고 별이 죽어간다. 앙그라마이뉴가 발동하고 영혼이 아르케로 날아간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다.

이 루프를 설계한 자가 있다. 베라모드 — 살라딘과 셰라자드, 두 사람의 영혼이 융합된 존재다.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를 만든 이유는 하나.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미래.

75.4 스파이럴

뫼비우스의 루프는 완벽하게 닫혀 있지 않다. 170만 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매 주기마다 미세한 오차가 축적된다. 같은 사건이 반복되지만 정확히 같지는 않다. 이 오차가 쌓이면 루프는 나선이 된다. 뫼비우스에서 스파이럴로, 닫힌 원에서 열린 곡선으로.

얼핏 보면 결정론처럼 보이는데, 반복 자체가 탈출의 조건이었다. 결정론 안에 자유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75.5 맺음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AngraMyNew다. Angra Mainyu + My + New. 한국의 게임 하나가 조로아스터교의 파괴신 이름을 가져와, 파괴가 곧 창조의 조건이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철학서가 아니라 RPG가. 6년에 걸쳐 쌓인 세계관이 공리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다.

갈루아의 감각이 군론보다 먼저 왔고, 모차르트의 음이 메시지보다 먼저 왔듯이, AngraMyNew의 공리는 허구 뒤에서 왔다. 형태가 이론보다 먼저 올 수 있다는 것, 이 프로젝트 자체가 그 증거다.

파괴가 창조의 조건이 되고, 반복이 탈출이 되고, 결정론이 자유가 된다. 닫힌 원 안에서 나선이 태어나는 것, 그것이 뫼비우스 위의 아름다움이다.

75.6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