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얽힘으로서의 사람
— 한 사람의 상태는 그 사람만 봐서는 결정되지 않는다
양자역학에서는 따로 떼어낸 입자 하나의 값만으로 전체 상태를 다 쓸 수 없다. 얽힌 두 입자의 상태는 둘 사이의 상관관계까지 포함해서 기술된다. 한쪽을 측정하면 다른 쪽이 같이 정해지고, 분리된 거리와 무관하게 그 상관관계가 유지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만 떼어 봐서는 그 사람이 잘 안 보인다. 외형, 직업, 소속, SNS 프로필은 측정값이고, 그가 누구와, 무엇과, 어떤 좌표계와 얽혀 있느냐가 그 사람의 진짜 상태다.
79.1 측정값과 얽힘은 다르다
측정값은 떼어내서 비교할 수 있다. 키, 직급, 연봉, 학력, 팔로워 수는 한 줄에 놓고 정렬이 된다. 그러니 사람을 측정값으로만 보는 사람에겐 비교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얽힘은 그렇게 안 된다. 누구와 어떤 강도로 묶여 있는지, 어느 좌표계 안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지, 어떤 죽은 자의 그림자가 그의 판단을 흔드는지는 떼어내서 한 줄에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연봉과 학력이 거의 똑같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인간일 때가 있고, 외형과 소속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 같은 좌표계를 공유할 때가 있다.
모방의 삼각형이 말했듯, 어떤 사람을 진짜로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를 모방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산 자를 모방하면 경쟁의 좌표계 안에 얽혀 있는 것이고, 죽은 자를 모방하면 계보의 좌표계 안에 얽혀 있는 것이다. 모방의 대상은 그 사람의 가장 강한 얽힘 중 하나다 — 그 외에 돈, 가족, 시스템, 상처, 죽은 선현과의 얽힘도 같은 자리에 들어간다.
79.2 팬덤은 머릿수가 아니라 망이다
모든 사람은 국가다에서 팬덤을 “한 사람의 좌표계 안으로 스스로 들어온 이들”이라고 정의했다. 얽힘으로 다시 보면 한 줄 더 정확해진다. 팬덤은 머릿수가 아니라 그 사람과 좌표계가 얽힌 사람들의 망이다.
머릿수만 보면 인플루언서의 100만 팔로워가 1인 국가의 1만 시민보다 커 보인다. 얽힘으로 보면 다르다. 100만 명이 측정값(외형, 화제성)에만 묶여 있으면 그 사람과 얽혀 있다고 하기 어렵다. 알고리즘이 흔들리거나 다른 자극이 오면 쉽게 빠진다. 1만 명이 좌표계로 묶여 있으면 그 사람의 단위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사람들이고, 그 망은 알고리즘 바깥에서도 작동한다.
기축통화가 말한 “남이 네 단위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이 얽힘이 발생한 순간이다. 단위를 받아 쓰는 사람은 그 단위의 발행자와 좌표계가 얽힌 사람이다.
관계의 금리의 말로 바꾸면, 강한 얽힘은 대개 고금리 접속에서 생긴다. 설명 비용과 오해 비용을 치른 뒤에도 남는 연결만 좌표계가 된다.
79.3 안다는 일도 자리가 달라진다
그러니 사람을 안다는 일도 자리가 달라진다. 약력을 외우고 직함을 정리하는 일은 외부를 정렬한 것이지 그 사람을 안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떤 좌표계 안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지, 옆에 어떤 죽은 사람을 두고 사는지, 누구를 떠올릴 때 결정이 흔들리고 단단해지는지를 같이 봐야 그 사람의 상태가 잡힌다.
자기를 아는 일도 그렇다. 자기 측정값을 정리하는 게 자기 이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정작 봐야 할 건 자기가 무엇과 얽혀 있느냐다. 어떤 좌표계 안에서 자기를 평가하고 있는지, 어떤 시선이 결정의 배경음으로 깔려 있는지를 보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측정값으로만 보인다. 고장 난 센서가 다룬 감각 왜곡도 여기와 이어진다 — 자기 감각만 믿으면 그 감각이 무엇과 얽혀 있는지 보지 못한다.
79.4 한계
이 글은 양자역학을 정확히 적용한 글이 아니라 비유로 빌려 쓴 글이다. 양자역학의 얽힘은 측정 결과의 상관관계라는 좁은 의미이고, 게다가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반면 사람들 사이의 좌표계 공유는 정보 전달이 핵심이다. 같은 단어를 쓰되 메커니즘은 다르다.
얽힘의 망을 외부에서 깔끔하게 관찰하기도 어렵다. 본인이 누구와 얽혀 있는지조차 본인이 잘 모르는 경우가 흔하고, 한참 지나서야 드러나기도 한다. 이 글은 사람을 보는 한 가지 자리를 제안할 뿐, 즉석에서 잴 수 있는 도구를 주지 않는다.
79.5 맺음
한 사람을 측정값의 합으로 보면 줄 세우기가 쉽다. 얽힘으로 보면 줄 세우기가 어렵다. 다만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후자에 더 가깝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측정값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무엇과 얽혀 있는지를 같이 보는 일이다.
79.6 관련 문서
- 모방의 삼각형 — 모방의 대상은 그 사람의 강한 얽힘 중 하나
- 모든 사람은 국가다 — 팬덤의 얽힘 정의
- 기축통화 — 단위를 받아 쓴다는 것의 얽힘
- 고장 난 센서 — 자기가 누구와 얽혀 있는지를 못 보는 자리
- 관계의 금리 — 얽힘이 발생하는 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