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테크노 샤먼: 증폭과 대체 사이


85.1 무당이라는 이름

이병한의 『대한민국 탐문』은 백남준을 테크노 샤먼으로 부른다. 이동통신으로 접신하고 신통을 부리는 미디어 아티스트 무당이며, 인류를 우주 문명으로 인도하는 선구자라는 것이어서, 호모 데우스가 된 우주소년들이 은하철도를 타고 우주로 나아가는 미래를 그가 먼저 보았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이병한이 백남준을 위로 읽는다면, 하늘은 밖에 있지 않다에서 그랬듯 AngraMyNew는 같은 사람을 반대 방향에서 읽는다.

종교어를 걷어내고 보면 백남준이 한 일은 접신도 신통도 아니다. 굿을 진동으로, 신통을 증폭으로, 제단을 배치로 바꿔 읽으면 남는 것은 하나다 — 그는 기계를 정신의 진동이 통과하는 장치로 만들었다.

85.2 기계를 뒤집다

텔레비전은 본래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장치여서, 위에서 아래로 송출하고 보는 사람은 받기만 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린 텔레스크린은 그 일방성의 극단이라 화면이 사람을 감시하고 정신을 대신 관리하는데,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바로 그 화면을 거꾸로 세웠다. 그는 위성으로 뉴욕과 파리를 실시간으로 이어 일방 송출의 기계를 사람과 사람이 마주 보는 자리로 뒤집었고, 오웰이 두려워한 감시 장치가 소통 장치가 될 수 있음을 1984년 첫날에 증명했다.

「TV 붓다」도 같은 손놀림이다. 부처가 카메라 앞에 앉아 화면 속 자기를 응시하는 이 작업에서 기계는 정신을 대신하지 않고 정신을 비추는 거울로만 서는데, 백남준에게 기계는 언제나 정신이 먼저였고 기계는 그 떨림을 키우는 장치였지 떨림의 출처가 아니었다.

「TV 첼로」(1971)도 다르지 않다. 텔레비전 석 대를 첼로 모양으로 쌓아 올린 악기를 샬럿 무어먼이 활로 그으면 화면이 켜지고 소리가 나는데, 기계가 악기가 되는 그 자리에서도 먼저 우는 것은 연주자의 몸이고 기계는 그 떨림을 소리와 빛으로 키울 뿐이다. 오웰의 화면을 소통으로, 부처의 화면을 거울로, 첼로의 화면을 악기로 바꾸는 동안 한 가지는 끝내 바뀌지 않았다 — 떨림은 언제나 사람에게서 먼저 났다.

85.3 증폭과 대체

여기서 교리 없는 교리의 경계가 다시 온다. 기술이 정신의 진동을 증폭하면 예술이 되고, 진동의 출처를 대신하면 없는 종교가 된다. 그런데 081에서 큐레이션과 교의화가 겉으로 구분되지 않았듯 증폭과 대체도 겉으로는 똑같으니, 둘 다 기계와 정신이 함께 우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진동의 출처가 사람이냐 기계냐 하나뿐인데, 그것은 화면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다.

85.4 측정이 진동을 대신할 때

백남준은 증폭의 극단이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 기계가 정신을 대체하는 자리는 어디서 열리는가. 한 예술가를 신으로 떠받드는 데서 열리지는 않는다 — 그런 손은 흔치 않다. 대체는 더 조용한 곳에서 열린다. 기술을 신비로 떠받들수록 그 신비 뒤에서 먼저 떨었던 인간의 몸이 지워지는데, 그 지워짐이 한 사람에 대한 오해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기본값이 될 때 증폭은 대체로 넘어간다.

하늘은 밖에 있지 않다에서 뉴럴링크가 악상을 측정하면 악상이 죽는다고 했는데, 테크노 샤먼의 위험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있다. 악상은 측정되기 전의 떨림이라, 측정 장치가 그 떨림에 대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악상은 데이터가 되어 버린다. 기계가 정신을 증폭하는 동안에는 예술이지만, 기계가 정신의 출처 행세를 시작하면 — 측정이 진동을 대신하고 장치가 악상을 발행하기 시작하면 — 같은 테크노 샤먼이 없는 종교가 된다.

백남준이 끝내 보여준 것은 기계 앞에서 사람이 먼저 떨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는 그 떨림을 멀리 실어 나를 뿐 떨림을 만들지는 못해서, 그 순서가 지켜지면 굿판은 예술이고 뒤집히면 굿판은 종교가 된다.

85.5 맺음

증폭하는 기계는 예술이 되고, 대체하는 기계는 없는 종교가 된다. 백남준은 사람이 먼저 떨고 기계가 키운다는 순서에 평생을 걸었고, 그 순서를 뒤집는 것은 그를 찬양하는 손이 아니라 떨림의 출처를 기계에 넘기려는 시대다.

85.6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