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곁에 둔 죽음
— 정적은 권력 안에 들여놓은 작은 죽음이다
46.1 이인임의 권력술
드라마 〈정도전〉에서 노회한 권신 이인임은 정적을 없애려는 자에게 이렇게 일러준다. “정적이 없는 권력은 고인 물과 같습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되고, 종국에는 권력을 잃고 죽게 됩니다. 권세와 부귀영화를 오래 누리고 싶다면 정적을 곁에 두세요.”
표면만 보면 권력술이다. 적을 제거하지 말고 곁에 둬라, 그래야 긴장이 유지되고 감각이 무뎌지지 않는다. 노련한 술수다. 그런데 이 문장을 한 층 아래로 내리면, 권력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의 사용법이 나온다.
46.2 정적은 작은 죽음이다
정적이란 무엇인가. 언제든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자, 내 판단을 늘 감시하게 만드는 자,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매일 눈앞에 들이미는 자다. 한마디로 정적은 나를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이다. 권력 안에 들여놓은 작은 죽음이다.
권력자는 그 가능성을 지우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것을 지우는 순간 감각도 같이 지워진다. 나를 끝낼 자가 사라지면 긴장이 풀리고, 긴장이 풀리면 내가 영원하다는 착각이 자리 잡는다. 그 착각이 부패의 시작이다.
다만 여기서 하나를 갈라놔야 한다. 곁에 둘 것은 정적이라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적으로 끌어안으면 모방의 삼각형이 말한 함정에 빠진다 — 적을 노려보다가 어느새 적의 좌표계 안에서 살게 되고, 그의 단위로 나를 재게 된다. 곁에 둘 것은 정적이 가리키는 것, 곧 죽음 그 자체다. 죽음은 비인격이라 나를 비교의 회로에 가두지 않는다. 그저 날을 세울 뿐이다. 그래서 이인임의 술수는 한 번 더 정제될 수 있다. 정적을 곁에 두라가 아니라, 죽음을 곁에 두라.
46.3 죽음을 멀리 둔 사람은 썩는다
죽음은 멀리 두면 공포가 되고, 가까이 두면 감각이 된다. 멀리 밀어둘수록 상상 속에서 부풀어 사람을 마비시키지만, 곁에 두고 매일 마주하면 오히려 시간을 또렷하게 만드는 자가 된다.
작은 죽음은 정적만이 아니다. 실패, 비판, 경쟁자, 노화, 물러날 가능성, 그리고 나를 대신할 후계자. 이 모두가 “너는 끝날 수 있다”고 말하는 작은 죽음들이다. 권력자든 보통 사람이든, 우리는 이것들을 삶에서 하나씩 지우며 편안해지려 한다. 비판을 차단하고, 경쟁자를 밀어내고, 늙음을 부정하고,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다. 그렇게 다 지우고 나면 분명 편해진다.
그런데 편해진 그 자리에서 자기 갱신도 같이 멈춘다. 죽음을 완전히 추방한 삶은 안전해지는 게 아니라 썩기 시작한다. 죽음: 시스템이 징수하는 마지막 세금이 평생 미뤄둔 정산서를 마지막에 한꺼번에 들이미는 순간이라면, 곁에 둔 죽음은 그 세금을 미리 조금씩 당겨 내는 일이다. 한꺼번에 압류당하지 않으려고, 매일 조금씩 자기를 정산하는 것이다.
46.4 가장 큰 작은 죽음 — 후계자
작은 죽음들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후계자다. 나 없이도 굴러갈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은, 내 끝을 미리 삶 안으로 들여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인임식 권력술이라면 후계자를 끝까지 의심한다.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자는 곧 나를 끝낼 자이므로, 권력을 오래 쥐려면 그 가능성을 미리 잘라낸다. 그런데 필요 없음의 두 얼굴이 갈라놓았듯, 필요 없어지는 데는 두 길이 있다. 시스템이 너를 버리는 폐기와, 네가 스스로 자리를 비워주는 확장. 후계자를 곁에 두는 것은 후자다. 내가 영원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그만두고, 내가 없어도 굴러갈 세계를 짓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후계자는 권력에게는 위협이지만 자기정화에게는 약이다.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자를 곁에 둔 사람은 자기를 영원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가장 큰 작은 죽음을 들여놓은 자리에서, 사람은 가장 덜 썩는다.
46.5 그래서, 무엇을 위해
여기서 이인임과 갈라선다. 이인임이 죽음을 곁에 두는 목적은 끝까지 권력 유지다. 정적을 둬서 안 썩고, 안 썩어서 부귀영화를 더 오래 누린다. 죽음은 그에게 방부제일 뿐이고, 방부제의 목적은 보존이다.
여기서 곁에 둔 죽음의 목적은 보존이 아니다. 안 썩은 시간을 오래 쥐고 있으려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창조로 환전하려는 것이다. 죽음은 가장 멀리 있는 마감처럼 보이지만, 곁에 두면 매일의 마감이 된다. 포식자의 의무가 말한 회계가 여기서 작동한다 — 그 마감이 곁에 있어야 “나는 섭취한 것 이상으로 창조했는가”라는 물음이 매일 살아 있고, 그 물음이 살아 있어야 시간이 곡률로 바뀐다. 마감을 멀리 치운 사람은 그 물음을 잊고, 잊은 채로 고인다.
그러니 파괴의 공리는 바깥을 향한 숙청이 아니다. 정적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곁에 둔 죽음이 내 안의 부패를 매일 잘라내게 하는 일이다. 칼날은 끝까지 안으로 향한다.
46.6 한계
죽음을 곁에 두라는 말은 자해적인 삶이나 파괴 충동이 아니다. 죽음을 미화하라는 말도, 없는 정적을 일부러 만들어 싸우라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단 하나, 나를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을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정적을 키워 권력을 오래 누려라”로 읽히면, 그건 그냥 이인임식 권모술수로 되돌아간 것이다. 곁에 둔 죽음의 끝은 더 긴 권력이 아니라 덜 썩은 자기다. 이것은 남에게 들이댈 처방이 아니라 자기에게만 묻는 회계다 — 나는 나를 끝낼 가능성을 너무 멀리 치워두지 않았는가.
46.7 관련 문서
- 죽음: 시스템이 징수하는 마지막 세금 — 마지막에 한꺼번에 걷히는 세금, 이 글은 그것을 미리 당겨 내는 법 (직전편)
- 포식자의 의무 — 마감 앞의 회계: 섭취 이상으로 창조했는가
- 필요 없음의 두 얼굴 — 폐기와 확장, 후계자를 곁에 두는 일
- 내가 필요 없는 세상 — 나 없이 굴러갈 세계를 짓기
- 모방의 삼각형 — 적을 끌어안으면 적의 좌표계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