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찾아 73개의 규칙을 만들었다

— 공리 없는 자유는 없다


62명과 73개의 규칙

교황을 끊고 국왕을 끊고 고향까지 버린 청교도 62명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다.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공동체를 만들며 내놓은 것은 73개의 규칙이었다.

규율에서 달아난 사람들이 왜 더 많은 규칙을 만들었을까.

함께 살기 시작하면 자유만으로는 정해지지 않는 일이 생긴다. 누가 결정하고, 의견이 갈리면 어떻게 하며,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리를 침범할 때 어디서 멈출 것인가. 아무도 답을 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큰 사람이 답을 정한다. 청교도가 발견한 것은 규칙 없는 자유가 아니라 규칙을 직접 세울 자유였다.

그들에게는 규칙보다 먼저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하나님과 성경이었다. 교회와 국가의 판단을 끊은 뒤에도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기준은 필요했고, 청교도는 그 기준을 신에게 두었다. 청교도: 면세의 극단이 마지막에 남긴 물음도 이것이었다. 모든 것을 끊은 사람에게도 끊지 않는 하나가 남는다면, 그것은 자유의 실패인가 조건인가.

자유로운 개인도 만들어졌다

미셸 푸코는 이 물음을 한 번 더 뒤집는다. 마지막 기준을 무엇으로 고를지 묻기 전에, 그것을 고르는 ’나’부터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공개 고문과 처형이 뒤로 물러나고 감옥과 교정이 앞에 나오자, 사법은 범죄만 보지 않고 범죄자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왜 그랬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성향과 위험을 가졌는지를 기록하고 판단한다. 심리학·정신의학·범죄학의 언어가 이 과정에 들어오면서 사람의 내면은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분류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감옥만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다. 학교는 생활기록부를 쓰고, 병원은 진단명을 붙이고, 군대와 직장은 사람의 능력과 태도를 평가한다. 이 기록들이 사람의 성격을 처음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점수와 적성과 성향으로 설명하는 습관을 몸에 넣었다. 근대의 개인은 규율이 끝난 자리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규율이 사람을 관찰하고 서로 구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내면의 예술가는 시스템의 계기판 대신 자기 계기판을 쥐라고 했지만, 그 계기판을 쥔 손이 무엇을 정상이라 배웠는지는 묻지 않았다. AngraMyNew가 딛고 선 개인도 스스로 세금이라 부른 규율이 만든 사람이다.

그러니 다 끊어낸 뒤 순수한 나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다.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자유를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는지에도 이미 배운 것이 들어 있다. 문명은 어디서 격노하는가가 첫 반응에서 체제의 국경을 읽었던 이유다. 규칙을 지운 뒤 나타나는 나도 규칙 바깥에서 온 사람은 아니다.

고르는 손까지 배운 손이라면, 누가 처음 규칙을 세웠는지만으로는 자유를 가를 수 없다. 이미 받은 규칙을 지금 누가 다시 쓸 수 있는가까지 물어야 한다.

누가 다시 쓸 수 있는가

청교도의 문제는 마지막 기준을 남겼다는 데 있지 않았다. 그 기준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의 해석을 교단이 관리했다는 데 있다. 자기가 세운 규칙은 고칠 수 있지만 신의 명령은 고칠 수 없다. 자유를 지키려고 남긴 기준이 어느 순간 자유가 닿을 수 없는 천장이 되었다.

공리는 출발점을 정하지만 결말까지 대신 쓰지는 않는다. 교리는 결말을 먼저 정한 뒤 모든 해석을 그쪽으로 모은다. 같은 문장도 질문과 수정이 허용되는 동안에는 출발점으로 쓸 수 있지만, 고치거나 떠날 권한이 사라지면 사람을 가두기 시작한다.

이 차이는 규칙이 느슨하냐 엄격하냐로만 갈리지 않는다. 수술 중인 사람이 멸균 원칙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그 순간에는 엄격해야 한다. 다만 수술이 끝난 뒤에도 누구도 그 원칙을 검토하거나 고칠 수 없다면, 안전을 위한 규칙은 권위를 지키는 교리가 된다. 자유는 모든 순간에 모든 규칙을 협상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규칙도 영원히 질문 밖으로 빼놓지 않는 일이다.

세 개의 공리

AngraMyNew의 3대 공리도 이 자리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믿어야 할 진리라서가 아니라, 자유가 자주 무너지는 세 방향을 막기 위해 세운 최소한의 규칙이다.

파괴의 공리는 칼날을 자기 안으로 돌린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남을 부수기 시작하면 그르누이처럼 타인의 본질을 재료로 쓰게 되기 때문이다.

창조의 공리는 부순 자리에 무엇을 남겼는지 묻는다. 기원의 파괴자는 낡은 집을 무너뜨렸지만 아무것도 짓지 않고 떠났고, 그가 해방한 자리에는 자유가 아니라 폐허가 남았다.

확장의 공리는 자기가 만든 답을 타인의 정답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문선명은 좌표계를 발명했지만 갱신권을 자기 한 사람에게 묶어두었고, 그가 사라지자 체계는 상속 분쟁으로 갈라졌다. 자기 자유를 위해 세운 규칙이 남의 출구를 막는 순간, 확장은 제국이 된다.

셋은 완성된 답이 아니다. 파괴가 폭력이 되지 않고, 자유가 폐허에서 멈추지 않으며, 확장이 새 교회로 굳지 않게 하려는 임시의 시작점이다.

이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 공리는 교리가 아니라 최소 규칙이다”라고 선언하고 끝내면 가장 쉬운 자기면제가 된다. 교리 없는 교리가 경고했듯, 자기를 의심한다는 문장조차 자기를 더 비판하기 어려운 장치로 바뀔 수 있다.

3대 공리가 출발점이었는지는 이 글이 증명할 수 없다. 누군가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고쳐 쓰거나, 필요 없다고 버리거나, 아예 다른 공리로 자기 천하를 세울 때 비로소 드러난다. 떠난 사람을 실패로 부르고 돌아오게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출발점이 아니었다. 사람을 붙잡기 위해 그어놓은 도착선이었다.

필요 없음의 두 얼굴은 내가 없어도 굴러가는 세계를 확장의 완성이라 불렀다. 공리도 마찬가지다. 이 세 문장이 계속 인용되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누군가 이 문장 없이도 자기 삶의 규칙을 쓰는 것이 성공이다.

맺음

자유를 찾아온 62명은 73개의 규칙을 만들었다. 규칙이 있어서 자유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자기들이 다시 쓸 수 있는 규칙과 끝내 손댈 수 없는 명령을 함께 세웠고, 그 둘을 오래 갈라놓지 못했다.

빈 종이만으로는 아무 삶도 시작되지 않는다. 첫 문장은 필요하다. 다만 그 문장을 쓴 손에서 지우개까지 빼앗기는 순간, 공리는 교리가 된다.

자유는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규칙을 다시 쓸 수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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